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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비롯한 김동신 등이 지리산에 의병의 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의병들은, “지리산중 인적이 없는 곳에 가옥을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하고 방책을 만들고 주식을 저축 하여 永久之策을 강구” 167) 했던 것이다. 이후 삼남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경우가 확산되었던 것 같다. 즉, 1908년 전반에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되었다” 168) 라거나,“「南騷益張」 南來 人의 전설을 據한즉 전라 경상 양도에 출몰하는 義徒들이 지리산을 근거하고 수천여 명이 집합하야 勢甚熾盛함” 169) 이라 한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심지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부대에 청국 인 王性王을 비롯한 수백명이 참여한 특이한 경우도 발견된다. 170) 이와 같이 1907-8년 사이에 삼남 지방의 의병들은 지리산을 훌륭한 조건을 구비한 활동무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리산의 의병 기지화는 의병장 고광순의‘축예지계’전략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고 광순은 지리산을 의병기지로 삼아 장기항전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전략을 수립한 창안자라 할 수 있 다. 1907년 후반 고광순은 김동신 등과 의견을 모아 지리산으로 이동하였다. 171) 그리하여 이들은 전라 도에서 경상남도 서부지역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다음의 기록이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본도(경상남도 ; 필자주)에 파급한 것은 작년(1907 ; 필자주) 9월 경성의 인물로서 일찍이 승지의 관직에 있었다는 김동신이라는 자가 고광순 · 洪永大를 손발로 삼고 전라북도를 건너 지리산에 근거를 만들고, 안의 · 하동 · 함양의 각 부락에 격서를 날려 국가의 위급을 호소하고 각료의 秕 政을 탄핵하며 겹쳐 일인을 몰아내지 않으면 더러움을 백세에 끼친다는 唱導에 선동, 매혹되어 맹 종하고 그 旗 밑에 모이는 자 날로 많아지며(『編輯資料』, 『자료집』 3, 565-566쪽). 고광순과 김동신 등은 전라북도로부터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경상남도의 안의 · 하동 · 함양 등 지로 활동지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반일투쟁이 계속되자, 일제는 경남 진해만에 있던 重砲兵隊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혈안이 되 었다. 172) 일제는 중포병대와 순사대를 동원하여 이들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광순 의병부대는 일제에 맞서 부대를 3개로 나누어 대응하였다. 즉, 고광수와 윤영기에게 각 각 1개 부대를 주어 경남 화개의 앞뒤 방향에서 공격하게 했으며, 자신은 고제량 등과 함께 피아골 연 167) 『토벌지』, 『자료집』 3, 767쪽. 168) 황현, 『매천야록』 권 6, 479쪽. 169) 황성신문 1908년 4월 29일자. 170) 『통감부문서』 10, 296-297쪽. 한편, 『편책』을 통해서도 청국인이 의병에 참여하거나 후원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 다(국가기록원 소장, 경무 88-21, 1908, 0294-0305쪽 및 경무 88-39, 1908, 0198-0202쪽). 171) 『김동신문집』, 7쪽 및 고광순, 『녹천유고』 , 「행장」 그리고 『편책』, 『독운사』 15, 754쪽 참조. 172) 위의 책, 5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