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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33 그런데 1909년 7월 일제 군경의 의병진압활동이 갈수록 강화되자 박사화는 부하들과 함께 영산포 헌병분대에 자수의사를 표명하였다. 156) 하지만 곧 결심을 바꾸어 다시 의병활동을 하다가 그해 10월 에 체포되고 말았다. 또한 전 나주군 서기였던 朴鏞植이 도통대장을 자칭하며 활동하였다. 그 역시 이 족출신으로 판단되는데, 그의 휘하에는 도포장 김원범 총독장 박규봉, 십장 이동언 원재룡 서경수 동 몽집사 김복동 등으로 구성되었다. 157) 이들은 사방에 격문을 배포할 수 있는 인쇄시설과 인쇄공을 갖 추고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족 출신 의병부대들은 서로 연락체계를 유지하며 수시로 연합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유생 출신 의병부대에 비해 결속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낮에는 양민으로 가장하였고, 밤에는 흑색복장을 착용하고서 활동하였다. 158) 한편, 의병에 가담하지 않은 일부 향리층은 이족 출신 의병부 대를 몰래 후원한 것으로 추정되며, 1909년 3월에 그들은 나주군민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정책에 호 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59)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1909년 9-10월 사이에 체포되었다. 이는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얼마나 치밀하고 강력히 전개되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 하 겠다. 결국 나주의병 전라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09년 후반 일제의 강력한 군사작전에 의해 거의 해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나주출신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가 국가의 정세가 위태롭다고 판단되자 귀국하여 경상 도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특이한 사례도 발견된다. 김현진이란 인물이니데, 그는 무안 에서 출생했으나 농사를 짓는 평민이었다. 160) 그후 남평에서 거주하다가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었다. 그는 1907년 말 上海를 거쳐 인천으로 돌아와 경북 청도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05-7년 사이의 일본의 주권침탈이 자행된다는 대한매일신보를 읽고서 분격하여 하와이 동포들로 부터 500원을 모금해서 귀국했던 것이다. 그는 경북에서 활동하던 최한룡과 활동하다가 1909년 4월 체포되었다. 이 외에도 崔匡鉉 崔澤鉉 崔柄鉉 등 隋城崔氏 일족의 의병활동도 집안에서 내려오는 족 보류 자료 등을 통해 확인된다. 161) 이상과 같이 나주지방의 의병은 다른 지역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즉 다른 지역에 비해 나주는 이족 출신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의 활동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다. 156) 『편책』, 『독운사』 15, 107-112쪽. 157) 『편책』, 『독운사』 14, 169-172쪽. 158) 『편책』, 『독운사』 14, 161-162쪽. 159) 배항섭, 앞의 논문(2006), 225-230쪽. 160) 『통감부문서』 2(국사편찬위원회, 1998), 162-166쪽. 161) 기우만, 「孝子崔公墓碣銘」(1914 撰) 및 오계수, 「烈婦孺人林氏碑記」, 『隋城崔氏世譜墓碣銘』, 1921 : 『羅州郡誌』, 나주군, 1980, 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