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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31 우 나성화 최우평 김도숙 등 나주의병이 심남일 의병부대에서 주로 활동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7-2) 의병활동 당시 나주의병의 활약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 등 언론에서도 게재되었다. 그 중에 하 나의 사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羅州郡에는 義兵이 更起熾盛하다는데 其 內容을 得聞한즉 義兵과 日兵에게 殺戮을 當치아닌 洞里 가 無하고 日兵들의 所爲는 但히 百姓에게 敗害많으니 義兵鎭壓은 姑捨하고 反히 義兵을 激起케 함이라. 日兵에게 財産家屋을 見失하고 多數한 人命이 料生할 수 없어 義兵에게 投入함이니 日本 人의 開化法은 如此한가 하고 民怨이 大端하다더라(大韓每日申報 1908년 11월 28일자 「義兵熾盛 의 內容」). 1908년 후반 나주에 의병이 크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일본 군경의 의병진압을 빙자한 토 색으로 말미암아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에 가담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주를 비롯한 전남지역의 의병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은 다음의 신문기사가 잘 보여준다. 全羅南道의 義兵形勢는 依然히 熾盛하여 其小部隊가 各處에서 出沒橫行하는데(중략) 彼義將等은 國家思想이 熱中하여 湖南義兵大將이라 稱하고 憲兵補助員及各地方에 檄文을 屢屢이 散佈하여 民 心을 煽動하며 日兵官吏를 捷敵할 뿐 아니라 快히 罵倒하는고로 居民은 義兵을 歡迎하며 其行動 을 秘匿함에 義兵의 出沒은 去益穩全自在하며 義兵은 東閃西忽에 出沒無常하여 其行動 頗히 巧妙 한데 居民들도 義兵에 漸益投入한다더라(『편책』, 『독운사』 13, 380-382쪽). 1909년 봄 전남지역에는 철저한 사상으로 무장한 호남의병대장이 이끄는 수많은 의병부대가 활동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항일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의병에 가담 하는 사람들이 더욱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족 출신의 의병장들의 의병활동을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크게 보면 유생 출신 의병장들의 의병활동과 차이가 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들 역시 반일투쟁과 함께 친일세력의 처단, 군자금 확보, 납세거부투쟁을 전개하였다. 박민홍은 언제 의병에 투신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심남일 의병부대 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11월 독립한 것 같다. 148) 그는 당시 약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활동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약 200명으로 증가한 것 같다. 149) 일제 경찰은 이어서 이들의 활동에 대하여 “군내 148) 『편책』, 『독운사』 13, 380-382쪽. 149) 『편책』 116. 나경비발 제23호 ; 위의 책, 412-4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