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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21 徐仁周·徐丙鶴 등이 주도하였다. 10) 이들은 지방 吏胥와 軍校의 박해로부터 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얻어야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해 11월과 12월에 각각 공주와 삼례취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는 충청·전라 관찰사로부터 동학도의 침탈을 방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으나, 그것은 말뿐이었다. 이에 이들은 교조의 신원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93년 3월에 光化門 伏閤上疏를 단행하였다. 保國安民을 표방한 동학교도의 위세에 놀란 국왕이 선처를 약속하자 이들은 일단 귀향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은 실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최시형은 1893년 5월 수만 명의 동학도들을 충청도 報恩에 모이게 하여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이른바 보은취회가 그것인데, 주로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각지에서 약 2만명의 교도가 참가하였다. 이 자리에서 동학교단은 교조신원뿐만 아니라 ‘斥倭洋倡義’를 표방함으로써 정치운동과 민족운동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1) 당시 광주-전남 지역의 동학도들도 보은취회에 적극 가담하였다. 순천 영암 무안 등지의 동학교인 260여 명이 보은에 모여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활동하면서 국왕의 批答을 받아야만 내려갈 것이라고 공언한 점 12) 으로 보아 그러하다. 이는 이들이 혈기방장한 20대의 나이에 동학에 투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당시 광양과 순천 지역 동학도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구례에서 거주하던 황현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1893 ; 필자주) 동학인들은 서쪽으로 임피·함열에서부터 동남쪽으로 광양·순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를 팔고 행장을 꾸려 식량을 준비하고 표주박을 이고 배낭을 짊어지고 기일에 맞추어 도착하느라 도로가 메워졌다. 민간에서는 소동이 일어났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며, 수령들도 두려움에 위축되었고 군영의 장수들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황현, 김종익 옮김, 『번역 오하기문』, 66쪽). 위의 인용문에는 동학교인들이 비장한 각오로 보은취회에 임하는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즉, 보은의 교조신원운동에 광양과 순천의 동학교인들이 소와 밭을 팔아 치우고 적극 가담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보은취회에 참가한 광양-순천의 동학교인의 숫자는 적어도 50여 명 이상으로 파악된다. 13) 이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을 것이다. 당시 보은취회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되는 광주-전남의 동학 접주는 다음과 같다. 장흥의 李邦彦, 10) 이광린·신용하 편,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 근대편(일지사, 1984), 125쪽. 11) 위와 같음. 12) 『동학란기록』 상(국사편찬위원회, 1959), 119쪽. 13) 위의 책, 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