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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27 (5) 金元國 金元範 형제 의병부대 김원국과 김원범은 형제 의병장이란 점에서 이채롭다. 이보다 앞서 활약했던 김태원과 김율도 형제 의병장이었다. 형인 金元國(1873-1909)은 광주 출신으로 호는 石浦, 본명은 昌燮이었다. 그는 1908 년 음력 5월 조정인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해 음력 8월에는 조경환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선 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909년 음력 정월 조경환 의병부대의 도포장을 맡은 동생 김원범 등이 어등산 에서 전사한 후 독립하여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었다. 선봉장 곽진일, 중군장 오덕신, 후군장 김재연, 도포장 이교학, 호군장 조찬성 등이 김원국 의병부대 의 지휘부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자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하여 목포에서 무기구입을 시도한 것 으로 전해진다. 또한 이들은 김성수 집안의 소작료를 징발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장 김원국은 ‘湖南義所’의 이름으로 광주세무서에 편지를 보내어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경고하 였으며, 나주 및 광주 향교에 의병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김원국 의병장은 1909년 4월에 임곡면 오산리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선봉장 곽진일에게 의병부대를 인계하고 부상을 치료하던 중 그 해 6월 11일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그는 경찰의 신문조서에서, ‘동생 김원범과 조카 金仁祚의 전사 로 인해 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항일투쟁을 선도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그후 광주지방재판소를 거쳐 대구감옥에 갇혀 있다가 1910년에 옥중 순국하였다. 한편, 그의 의병부대는 광주 나주 능주 함 평 영광 장성 창평 담양 동복 등지로, 주로 전남 중서부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金元範(1886-1909)은 형과 마찬가지로 광주 출신이며, 1908년 후반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다. 그후 그는 조경환 의병부대의 도포장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음력 정월에 어등산에서 체포 된 후 자결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형인 김원국은 더욱 항일의지를 불태우며 활동하였다. 이와 같 이 김원국 김원범 형제는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6) 梁振汝 梁相基 부자 의병부대 양진여(1862-1910)와 양상기(1883-1910)는 父子 의병장이다. 이들은 광주 출신으로, 아버지 양 진여는 스스로 격문을 짓고 의병장에 추대될 정도의 학문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양진여는 체포된 후 ‘능주의 유학자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공자의 도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진술한 점으로 보아 평민이라 하더라도 학문적 수준이 상당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일제측 기록에 보이는 주막업이란 그의 직업은 거병을 하기 위한 군자금 조달이나 혹은 의병을 모집하고 각종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방편이 었을 것이다. 그는 1908년 음력 6월 중순 의병을 모집하는 광고를 낸 후 같은 달 하순 광주 삼각산 죽청봉에 30여 명의 의병을 불러 모았다. 당시 그는 일본인 관리의 임명 반대, 친일정부의 전복, 일본세력 구축 등을 내걸고서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이들은 300명 규모의 의진을 결성한 후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