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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 장성소식 음력 2월24일(양 3.26 ; 필자주)에 의병대장 김참봉 태원씨가 포군 칠십명을 거느리고 장성군 토 물 뒷봉에 복병하고 일병과 싸우는데 처음에는 일병 삼명이 죽고 일명은 도망하여 각처의 수비대 에 請兵하여 일병 육십여명이 와서 오전 여덟시부터 오후 열두시까지 접전하였는데 일병은 삼십 여명이 죽고 의병도 십여명이 죽었고 (하략). 4月 24日 장성 본사통신원(『경향신문』 1908년 5월 1일자). 위에서 보았듯이, 김준 의병부대는 장성의 土泉戰鬪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당시 의병들은 토천의 뒷산에 보루와 방어진지를 쌓은 다음 적을 유인하여 온종일 공방전을 벌인 끝에 수십명의 전과를 거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1908년 3월 이후 김준·김율 의병부대는 전력의 손실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예컨대, 의병장 김준은 영광 낭월산 전투에서 도포장 최동학을 잃었으며, 대곡 전투에서도 기습을 받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는, 각 읍면마다 설치된 자위단과 각 마을별로 친일세력인 일진회원들이 의병 활동을 밀고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의 강력한 군사작전은 수시로 전개되었으며, 3월에는 제2특 설순사대까지 편성되어 의병장 김준과 김율의 제거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4월 19일에 는 광주수비대에서 김준 의병부대 소탕하기 위해 8개 종대를 편성해서 15일간의 군사작전을 실시하 였다. 131) 그리하여 김준 김율 의병부대의 활동은 다소 위축되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두 의병장의 의기 는 더욱 확고해졌다. 김준은, “승패는 보통 일이다. 오직 마땅히 충의를 격려하여 큰 승리를 도모함이 늦지 아니하다”라고 하며, 의병확보와 투쟁역량의 제고에 고군분투하였다. 그러던 중 동생 김율은 광주 所旨坊(현 송정읍)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132) 이에 앞서 동생 김율이 이 끌던 의병부대의 名簿가 일본 경찰에 피탈되기도 했다. 김준은 동생 율을 구출시킬 계획을 세우던 중 허리의 통증이 심해져서 치료를 위해 광주 박산 마을 뒤의 魚登山에 들어갔다. 일본군 기병대와 제2 특설순사대는 김준의 은신처를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133) 이를 알아챈 의병장 김준은 부하들에게, “나 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에 이미 결정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장차 왜놈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아울러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뒷일을 힘써 도 모함이 옳다”며, 피신을 권유하였다. 결국, 기어이 남겠다는 부하 金海道 등과 같이 의병장 김준은 1908년 4월 하순 순국하였다. 한편, 광주감옥에 갇혀 있던 의병장 김율을 관찰사가 신문하려 하자, “너는 왜놈의 앞잡이로서 감히 백성 앞에 나설 면목이 있느냐”라며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김율은 자신의 주장을 131) 『폭도사』, 43쪽. 132) 위의 책, 40쪽. 133) 『제2순사대에 관한 편책』(내부 경무국,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08) ; 『의중태산』, 277-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