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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17 통령을 비롯한 선봉장·중군장·후군장·좌익장·우익장·포대장 등으로 편제되었으며, 종사와 참 모 등은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전략과 전술을 짜는 역할을 한 듯하다. 運糧은 군수를 지 원하는 부서이며, 총독·監器의 임무는 군율을 담당하는 직책이었을 것이다. 1-2)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 호남창의회맹소는 자신들의 거의 사실을 전국에 널리 알렸다. 이들은 고유의 인심을 지키고 전통적 인 제도를 보존하기 위해 일제의 침략을 단호히 배격하겠다는 점을 천명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의 주 권과 천연 자원, 그리고 국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서 “풀이 바람을 따르듯” 모든 계층이 의병에 참여하거나 협조해달라고 호소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강원도와 경상도의 의병부대들과의 연대를 중시하였으며, 구미열강의 외교적 협조를 기대하였다. 특 히, 일본인의 처단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요컨대, 이들은 대외선린관계의 중시, 타 지역 의진과의 연 대 강화 그리고 현상금 제도의 도입 등을 표방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廣告文을 발표하여 주민들이 지켜야 할 사항을 제시하였다. 110) 곡식의 역외유출 금지, 수입품의 매매 금지, 친일파의 처단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궁장토와 역둔토의 賭租를 義所에 바칠 것, 세금을 내지 말 것, 自衛團과 일진회에 가입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들이 일제의 경제적 침탈 의 심각성을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대체로 종래의 의병들은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나 외국 상품의 폐해, 일제의 경제적 침탈 등을 언급한 경우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런데 호남창의회맹소의 활 동은 주민의 생존권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 은 훗날 호남지방의 후기의병들이 집중적으로 거론할 만큼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의병들의 납 세거부 및 방곡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다음으로 이들은 대한매일신보사에 격서문을 보내어 자신들의 의병봉기 사실을 게재해줄 것을 요청 하였다. 111) 계몽운동세력과 의병운동세력은 시국관이나 국권수호의 방략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 었다. 하지만 보수적 유생이었던 이들이 계몽세력이 주도하는 언론기관을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주목 된다. 그리고 호남창의회맹소는「布告萬國文」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萬國公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각국이 交隣하자고 호소하였다. 112) 이들은 성리학적 입장에 서 서양의 문화를 비판하면서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7년 10월말에 시작하여 다음해 1월말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 2월 2 일에 의병장 기삼연이 전북 순창에서 체포됨으로써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의병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지역은 주로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 무장 등 전라도의 서부지역이었다. 또한 이들의 주된 공격 대상은 각 군읍에 상주하는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 그리고 110) 「廣告文」, 『호남의병장열전』 ; 『자료집』 2, 621-623쪽. 111) 「대한매일신보사 여러분에게」, 『호남의병장열전』 ; 『자료집』 2, 609-610쪽. 112) 「포고만국문」, 『호남의병장열전』 ; 『자료집』 2, 614-6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