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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15 전남 장성에서는 배일감정이 더욱 고조되면서 거의를 도모하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96) 의병을 일으 킬 준비는 奇參衍(1851-1908) 등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97) 기삼연은 奇正鎭의 재종질로서 명문 유 생이었다. 그의 자는 景魯, 호는 省齋로서 장성에서 출생했다. 그는 이미 1896년에 기우만이 주도했 던 장성의병에 참여한 바 있으며, 1902년 5월에도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된 적이 있었다. 1903년에 도 그는 ‘忍痛含寃’네 글자를 가슴에 새기며 오로지 거의할 궁리에만 전념하였다. 따라서 그는 의병 에 뜻이 있는 동조세력을 모으기 위해 장성을 비롯한 인근 郡邑의 뜻있는 인사들과 빈번히 접촉하였 다. 98) 예컨대, 1906년 봄 그는 영광의 金容球와 자주 만나 거의를 모색하였다. 이들은 매달 만나 거의 와 관련된 문제를 협의하고 동조세력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99) 마침내 기삼연은 장성 隨緣山 石水菴에서 의병을 불러 모았다. 100) 기삼연이 주도한 湖南倡義會盟所 에 참여한 인물들은 대체로 기정진 계열의 유생들이었다. 101) 1907년 10월 중순 일제는 그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포착하였는데, 이 의병의 규모를 30여 명으로 파악하였다. 102) 이들은 석수암에 얼마동안 주 둔하다가 전북 고창의 文殊寺로 이동하였다. 103) 10월말 이들의 규모는 약 4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104) 갑자기 의병의 규모가 증강된 배경에는 문수 사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와 함께 영광의 김용구와 이영화, 나주의 김태원, 장성의 이철형, 함평의 이 남규 등이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05) 그리하여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 가 결성되었다. 106) 호남창의회맹소의 주요 部署와 주도인물들은 다음의 표와 같다. 96) 『폭도사』(전라남도 경무과, 1913) ; 『비록 한말전남의병투쟁사』, 이일룡 역(전남일보인서관, 1977), 9-10·20-21 쪽 및 金允植, 『續陰晴史』 下, 121·172-3·181쪽 참조. 97) )『杏史實紀』권 3, 「行狀」(安圭容 撰) 참조. 98) 「義所日記」,『자료집』2 ; 『義兵實記--統領 金容球---』(영광향토문화연구회, 1988), 56쪽. 99) 강길원, 「후은 김용구의 항일투쟁」, 『인문논총』 16(전북대), 75쪽. 100) 석수암은 隨緣山에 소재한 것으로 전해질 뿐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되자 일제측이 이 사찰을 放火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수연산의 본래 명칭은 靈鷲山이었으나 이 산에 소재한 隨緣寺라는 절로 인하여 隨緣山이라 불려졌다(『신증동국여지승람』 5<민족문화추진회, 1970> ; <1984>, 6쪽). 수연산은 현재 전라 남도 장성군 삼계면 덕산리와 동화면 서양리, 그리고 황룡면 관동리 등 3面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데, 영광군과 접 해 있다. 이 산을 간혹 隨綠山으로 표기한 경우(姜在彦, 「反日義兵運動의 歷史的 展開」, 『朝鮮近代史硏究』<日本評 論社, 1970> ; 『韓國近代史』<한밭출판사, 1982>, 286쪽 ; 오길보, 『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과학백과사전종합 출판사, 평양, 1988>, 240쪽 ; 홍순권, 앞의 책, 101쪽 ; 박성수, 『한국사』 43<국사편찬위원회, 1999>, 427쪽 등) 도 있으나, 이는 隨緣山의 誤記이다. 101)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227쪽. 102) )『폭도사』, 27쪽. 103) 홍영기, 앞의 책, 229쪽의 각주 26 참조. 104) 『폭도사』, 28쪽. 105) 이와 관련하여 「호남의병장열전」, 『자료집』 2, 632·640쪽 ;『義兵實記』, 22-23쪽 ; 高光烈, 「三義士行狀」, 『자 료집』 3, 300쪽 ; 「金竹峰行狀」(吳東洙 撰), 『竹峰靑峰事蹟』(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40) 그리고 『편책』, 「光秘發 제250호」(국가기록원 소장, 경무 88-31, 1908), 0880-0884쪽 참조. 106) 홍영기, 앞의 책, 230쪽 각주 3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