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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13 수행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는 주로 영광 불갑산과 함평 석문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불갑산과 석문산은 유격전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영광 불갑산 전투, 장성 동화 전투, 담양 大峙 전투, 함평 월야 전투 등에서 많은 전 과를 올리며 전남 서부지역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항일투쟁뿐만 아니라 주민 보 호에 앞장섰다. 군수품을 조달할 때에도 가능한 그 댓가를 지불하였으며, 假義의 퇴치, 헌병보조원의 만행, 세무관리의 행패, 일진회원의 비행 등으로부터 주민들을 적극 보호해준 것이다. 이로써 주민들 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함평군 월야면 자은동 전투에서 전해산 의병부대에 패배한 일 제는 그 화풀이로 민가에 불을 놓아 1백여 호를 태워버렸다. 하지만 주민들은 의병들을 원망하지 않 았다. 하지만 일제 군경은 갈수록 증강되었고, 탄압 역시 강화되어갔다. 이에 전해산은 심남일 김영엽 오 성술 등과 함께 호남의병의 연합조직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겨울 이들은 湖南同義 團을 탄생시켰다. 그는 호남동의단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 편제는 다음과 같다. 대동의병대장 전기홍 제1진의병장 심남일 제2진의병장 박도경 제3진의병장 김영엽 제4진의병장 조대천 제5진의병장 신화산 제6진의병장 이순식 제7진의병장 이기손 제8진의병장 오성술 제9진의병장 권 택 제10진의병장 안덕봉(『해산창의록』, 2-3쪽). 당시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모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전라도 서부 에서 동부까지 망라되었는데, 이들이 연합조직을 결성한 것은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93) 이들의 활동이 단연 두각을 나타내자, 일제는 전해산이 이끄는 대동창의단을 진압하기 위한 전담 토 벌대를 편성하거나, 한국인 밀정과 일본 수비대, 경찰을 주축으로 하는 변장정찰대를 구성하여 산과 들을 샅샅이 뒤졌다. 1909년에 들어와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결국 전해산 의병부대는 시간 이 흐를수록 활동이 크게 위축되어갔다. 특히 1909년 4월 이들은 영광 오동 및 덕흥 전투에서 잇따라 패하였다. 이로 인해 이들은 재기가 불가능한 어려운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전해산은 남은 의병을 해산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의병을 해산하면서 한 편 의 시를 남겼는데, ‘호남 삼월에 오얏꽃은 지는데 보국할 서생이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또한 사정을 알고 떠나가는 나를 밤새 부르며 돌아가지 말라 하네’라고 하여, 비참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93) 홍영기, 앞의 책(2004), 3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