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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기 및 중기의병기에 해당되는 시기의 영광지역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시도와 계획을 수립하는 태동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1907년 후반에 전남의병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는데, 영광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의병장 奇三衍 에 의한 湖南倡義會盟所의 결성이 그것이다. 여기에 상당수의 영광출신 인사들이 참여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는, 이미 一心契라는 사전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영광 은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의병항쟁의 중심무대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영광읍은 적어도 세차례 이상 의병의 습격을 받았으며, 법성포 역시 2회 이상 공격당하 였다. 이는 일제침략의 중요 거점에 주둔한 일본수비대나 헌병대 그리고 이주한 일본 농어민 및 상인 등을 내쫓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의병들은 친일파 세력인 一進會員·헌병보조원·순사·밀정·공전 영수원 등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의병활동이 국권회복과 향토수호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 이다. 한편, 의병활동 기간중 의병의 숙식해결과 행동양태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의병들은 대체로 주민 들로부터 식사를 제공받았고, 숙박문제는 계절에 따라 달리 해결하였다. 즉 여름에는 산과 들에서 露 宿을 위주로 하였으며, 겨울에는 촌락이나 사찰 등지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영광 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佛甲山의 佛甲寺와 海佛庵 등 사찰세력이 의병을 후원하였음을 밝힐 수 있었 다. 다만, 의병을 적극 후원한 승려로는 幻海(環海)나 錦華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을 찾을 수 없어서 아 쉬웠다. 이러한 불교계의 항일의식이 훗날 영광에서 민족종교인 圓佛敎가 창시될 수 있었던 정신적 토양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영광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金容球·金準·金聿·全海山·李大克·李哲衡·朴砲 大·李起巽 등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수시로 진압작전을 펼쳤으며, 전담 토벌대나 변장대를 투입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영광지역 의병들이 줄기차게 일제에 저항하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결국 일제는 1909년 9-10월 사이에 전남지역 의병을 일소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전남의병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 종식되었는데, 영광지 역 의병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광의병은 독립군으로의 전환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지역적으로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기 어려운데다 일제군경의 무자비한 군사작전에 의해 대부분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2) 全海山 의병부대 전남 서부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의병활동을 전개한 의병부대는 全基泓(1879-1910)이 이끌었다. 따 라서 여기서는 그를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을 서술하고자 한다. 그는 전북 임실 출신으로 나주 영광 등 전라남도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84) 그의 자는 垂鏞이고, 자호한 海山은 항일투 쟁을 전개할 때 산과 바다를 누비며 활동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가난한 유생 집안에서 태어 84) 강길원, 「해산 전수용의 항일투쟁」, 『역사학보』 101(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