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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09 여 4월에는 보름예정으로 8개 부대를 편성하여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아울러 특설제2순사대를 투입 하여 이들을 완전히 제거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76) 결국 일본군경과 특설순사대에 의해 김준·김율 의 병장도 목숨을 잃었다. 77) 이에 굴하지 않고 영광지역의 의병들은 더욱 거세게 항쟁을 주도하였다. 일제의 정치·경제적 침탈 이 날로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일제는 1908년 12월 15일에도 전남 일원에서 활동하는 의 병을 진압하기 위해 8개 부대를 편성하여 군사작전을 펼쳤다. 78) 하지만 1909년에 들어서도 의병의 활 동이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맹위를 떨쳤다. 일제는 행정관서까지 동원하여 의병진압에 열을 올 렸다. 즉, 전라남도 관찰사 申應熙는 1909년 3월 6일자로 주민들에게 의병의 동태를 밀고하라고 강 요하는 諭告를 발표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79) 이어 5월에도 일제는 영광 법성포 등 의병이 성한 지역 에 관찰사를 파견하여 주민들을 모아놓고 의병진압의 필요성과 의병출현시 신속한 신고체계의 확립 을 강조하였다. 80) 6월과 7월에도 연달아 變裝隊와 전담 토벌대를 편성하여 영광에서 주로 활동하는 의병장 전해산 등을 체포하려는 일제의 집요한 추적이 계속되었다. 81) 그래도 전남지역 의병의 활동이 위축되지 않자, 일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폭압적인 형태의 군사작전을 실시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른바 「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 그것이다. 바꾸어 말하 면 의병대학살작전이라 할 수 있는데,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2개월동안 진행되었다. 이를 두 고 일제는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작전”으로서 “작전의 결과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대”했다고 자 평하였다. 이로써 전남의병의 희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일본측이 밝힌 피해만 하더라도 전사 420명, 피체 1,687명, 총기피탈 455정이나 되었다. 82) 영광에서 활동하던 의병들도 이때 대부분 희생 되거나, 피체 혹은 자수를 면하지 못하였다. 타 지역 출신으로 영광에서 돋보이는 활동을 전개한 의병 장 전해산은 1909년 음력 3월에 의병을 해산하고서 잠적했다가 그해 12월 17일에 피체되었다. 83) 이상과 같이 영광의 의병은 1896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당시 호남의병 의 중심지인 장성과 나주의 外延에서 그야말로 주변적 역할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우만 이 주도하는 장성의병에는 주로 양반 유생들이 일정한 역할을 맡았다. 반면에 나주의병의 경우 吏族 들이 주도하게 되자, 영광의 鄕吏인 정상섭이 적극 참여하여 주도인물로 활동한 점이 주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다시 의병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영광에서는 창의를 모색하는 단계에 머물렀다. 아직까지도 전라우도, 즉 서부지역을 휩쓴 동학농민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기 76) 內部 警務局 編, 『第2巡査隊에 관한 編冊』(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08). 77) 『폭도사』, 44-45쪽. 78) 위의 책, 79쪽. 79) 『편책』, 『독운사』 13, 647-648쪽. 80) 『편책』, 위의 책 14, 379쪽. 81) 『편책』, 위의 책, 581-584쪽과 같은 책 15, 92쪽. 82) 『폭도사』, 142쪽. 83) 위의 책, 143-1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