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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9 유대감이나 공동체의식이 강화되어 신자층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특히 최제우를 이어 도통을 전수받은 崔時亨(1827-1898)은, “동학을 깨닫는 자는 호미들고 지게진 자에서 많이 나온다”거나 “부귀한 자, 글 잘하는 자는 도통하기 어렵다”고 주장함으로써 차별받는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들을 적극 포섭하였다. 또한 그는 스승의 사상을 받들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모든 교인들은 서로 “接長”으로 호칭하거나,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 하여 모든 교인은 평등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아울러 ‘사람마다 하느님을 모셨다(侍天主)’는 점과 ‘하늘을 받들듯이 사람을 섬기라(事人如天)’는 말에도 동학의 평등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시천주 사상은 조선왕조 사회에서 차별과 소외 속에 고통당한 평민과 천민들에게 만인평등의 사상과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하였다. 5) 그 결과 동학은 억압과 수탈의 굴레아래 신음하는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매우 빠르게 수용되었으며, 사회적 모순이 심화될수록 동학의 교세 역시 더욱 신장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동학이 전라도에 언제 수용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동학이 전라도 지역에 수용되고 발전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1861년을 전후한 시기에 전라도에 처음으로 동학이 전해졌으리라 추정한다. 그것은 최제우가 慶州에서 동학을 전파하던 중 주변의 분란을 피하여 남원의 隱寂菴에서 약 8개월간 수도와 포교를 한 사실로써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당시 그는 남원에 머무르던 중에 劍歌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에는 임진왜란 당시 광주출신 의병장으로 활약한 金德齡의 억울한 죽음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이 전라도 지역의 동학 수용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이 지역 사람들이 동학에 더욱 호감과 친숙함을 가졌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 그런데 전라도에 대한 포교는 1861년을 전후한 시기에 최제우에 의하여 전북 남원을 중심으로 한 珍山·錦山 등 주로 산간 내륙지역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864년 최제우의 죽음으로 다소 위축되었다가 1880년대 말부터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의 2대 교주인 海月 崔時亨(1827-1898)이 전주와 參禮 등지를 순회하던 시기와 전북 출신 동학교도가 최시형을 면담한 시기가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훗날 전봉준과 김개남 등과 같은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지도자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동학에 입교하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 1860년대 초와 1880년대 말을 전후한 시기에 동학은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수용·확산되었다. 그렇다면 광주-전남 지역에는 언제부터 동학의 포교가 이루어졌을까. 1861년 최제우가 남원에 머무른 시기와 관련될지, 아니면 1880년대 후반 최시형의 활동과 연관되는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5) 신일철, 『동학사상의 이해』(사회비평사, 1995), 23∼27쪽. 6) 『전라남도지』 제6권(전라남도, 1993), 70∼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