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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205 전을 감행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의 의병활동을 일본측은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폭도(의병 : 필자주)들의 행동은 극히 교묘하여 白晝에는 양민을 가장하고 공공연히 군청 소재를 배 회하면서 관서의 동정을 정찰하고, 만약 好機를 잡으면 즉시 刺客的 행동을 감행, 총기·탄약·재화 를 약탈하고 혹은 虛를 틈타 저격·내습을 하는 등 그 隱現出沒을 미리 헤아릴 수가 없었다. 또 순사 주재소는 거의 전부가 습격을 당하였고, 양민을 위협하여 租稅를 횡령하고 재류일본인 및 그 使役하 에 있는 조선인은 대개 폭도의 毒手에 목숨을 잃어 다년간 사업 경영을 포기하고 그 근거지로 퇴각하 여야 하겠금 되었으므로 농업이 번성하였던 전라 양도는 이제 바야흐로 황무지화 하게 되었다(「토 벌지」, 『자료집』 3, 771-772쪽). 이와 같이 의병들은 대규모의 병력을 모아 군읍을 정면 공격하던 종래의 전술에서 탈피하여 유격전술 로 전환함으로써 의병활동이 매우 왕성해진 사실을 일본군경도 자인하는 실정이었다. 실제 이들은 영 광지역 내에서만 1907년 9월이후 다섯차례, 1908년에는 20여 회, 1909년에는 약 50여 회 전후의 크고 작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48) 영광의 경우 시간이 흐르면서 의병활동이 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경과 의병 사이에는 매우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러한 정황은 다음과 같다. 전남 영광수비대 特務組長이하 9(외에 韓巡査 2)명은 (1909 ; 필자주) 4월27일 同地 西南 약 4리의 지점에서 전해산이 인솔하는 적 약 백명과 충돌 교전중 羅山守備隊少尉以下 15명이 來着 協力, 이를 공격하였으나 적은 촌락방어를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므로 다시 영광으로부터 下士以下 6騎를 파견 하고 또 靈光憲兵分遣所 上等兵以下 12명 및 영광수비대장이하 13騎 및 순사 2명이 급행 증원하여 斷續的인 교전 17시간에 이를 격퇴하였다(『편책』, 『독운사』 14, 473쪽). 일본군경 도합 59명과 의병부대 약 1백명 사이에 약 17시간에 걸쳐 사력을 다한 혈전이 전개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이는 1909년 초에 의병의 전투력이 괄목할만큼 성장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의병활동은 재정적 뒷받침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무기를 제작하거나 신식무기의 구입뿐만 아니라 숙식의 해결 등에도 적지않은 경비가 소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전라도에서 활 동한 의병장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따라서 군자금을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면 영광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군자금을 어떻게 조달하였을까. 전남의 동부지역이나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의병장 안규홍과 심남일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활동지역내의 면장들에게 48) 이러한 사실은 일본측이 남긴 『편책』과 『폭도사』 등을 참고하여 검토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