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page

20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된다. 이곳에 이주한 일본 상인들은 의병의 습격설에 놀라 한국인 복장으로 변장하고서 피난하고 있 는 것이다. 42) 물론 일본에서 이주한 농업경영자나 어부 등도 의병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일 제의 통신시설이나 전기시설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43) 그리고 친일파인 일진회원과 밀정, 의병에 비협 조적인 부호, 세무관리나 공전영수원 등도 의병의 공격대상이었다. 때로는 상황에 따라 일진회원-> 기독교인 -> 천주교인 -> 의병 -> 일본 순사보조원을 전전한 인물인 邊永瑞를 의병들이 응징한 경 우도 있었다. 44) 그런데 의병의 활동이 언제나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근대적인 무기는커녕 훈련조차 제대 로 이루어지지 않아 기습이 아닌 경우에는 의병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병의 지 도부는 효과적인 전략전술의 수립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남창의회맹소를 이끌던 기삼연과 김 용구는 시국의 절박함을 들어 즉각적인 무력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이대극은 의병 의 훈련과 정예의 무기의 확보가 선결과제라고 인식하였다. 다음의 글이 저간의 사정을 알려준다. 대극이 성재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중략)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을 가지고 용감무쌍한 적의 군 사를 상대하면서, 더구나 무딘 칼날과 둔한 화승총으로 저놈들의 서릿발같은 칼날과 번개같은 포를 상대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이를데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군사를 휴식하여 싸우지 말고 먼저 총칼 을 만들어서 만전을 기하는 것이 급무일 듯 합니다.” 성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대 말대로 총 칼을 먼저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삼의사행장」, 『자료집』 3, 300-301쪽). 위의 인용문에 있듯이, 기삼연은 이대극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상황의 절박함을 들어 즉각적인 무력투쟁을 내세운 것이다. 김용구 역시 기삼연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였다. 즉, 세번째의 영 광읍 습격에 나서야 한다는 김용구의 주장에 이대극은 반대하며 군비를 먼저 정돈해야 한다고 하였 다. 45) 이대극은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광의 석대산을 근거지삼아 군사를 휴식시키며 무기의 제작에 진력하였다. 46) 그러나 기삼연과 김용구는 일제와 계속하여 항전을 전개하다가 1908년 2월초에 기삼연은 부상을 당해 전북 순창에서 은신중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광주로 압송되어 정식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 은 채 피살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통령 김용구가 호남창의회맹소를 이끌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대극은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인 김준과 연합전선을 펴기로 하고서 이른바 犄 角之勢를 형성하였 다. 47) 이들은 의병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면서 보다 효과적인 투쟁을 위해 소수의 정예의병으로 유격 42) 『편책』, 『독운사』 8, 487쪽. 43) 위와 같음. 44) 「호남의병장열전」, 『자료집』 2, 621-623쪽. 45) 『편책』, 『독운사』 8, 513-514쪽. 46) 「삼의사행장」, 『자료집』 3, 301쪽. 47)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