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page

한말의병 199 을 떠나 잠적하기도 했다. 이는, 의병항쟁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에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설 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진사로 잘 알려진 이철형은 영광군 內東面 水客에서 살았다. 27) 그는 기삼연의 문인이었던 관계로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中軍將을 맡아 활동하다가 기삼연 死後에 독립하였다. 28) 이철형의 진술 을 통하여 당시 그의 경제적 기반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밭 3두락을 소유한 자소작농이었다. 29) 이 로써 볼 때 그는 스승 기삼연과의 사제관계로 인하여 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의 투철 한 시국관도 그의 의병참여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일제의 정치적 침략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의병에 투신하였음을 밝힌 점 30) 에서 그러하다. 타 지역 출신으로 영광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전해산과 김준·김율 형제를 들 수 있다. 전해산은 전북 임실출신으로 15-6년간 학문에 전념해온 유생이었다. 그는 특히 춘추좌씨전에서 영 향을 받아 당시 정세에 비분강개하여 의병에 투신한 우국지사였다. 31) 그는 원래 전북의 의병장 李錫 庸과 활동하던중 남원에서 크게 패한 뒤 김준의 휘하에서 활동하려고 전남으로 이동해왔다. 그러나 김준이 이미 순국한 관계로 김준의 부장이었던 조경환과 제휴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7월 에 독립하여 유배수출신 정원집을 先鋒將으로 삼아 전남 서부지역에서 돋보이는 활동을 벌였다. 32) 김준과 김율은 나주출신으로서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이었다가 후에 독립,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이 름을 날렸다. 영광읍과 법성포 공격을 주도하였으며, 전남 의병의 투쟁역량을 한단계 끌어올린 장본 인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군경은 이들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될 정도였다. 이밖에도 기삼연을 비롯한 이기손·박포대 등 타지역 출신, 그리고 영광출신 가운데 박경욱이나 이화삼 등은 영광과 불 가분의 관계를 갖고서 활동한 의병장이라 할 수 있다. 영광에서 활약한 의병장들은 출신지역을 초월 하여 협조체제를 돈독히 유지하면서 일본과의 힘겨운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들이 의병항쟁을 본격화하던 1908년 초에 영광과 인근의 함평 등지의 주막이나 길거리에 게시한 의병의 격문에는 당시 의병들의 거의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國家가 있은 연후에 君이 있고 君이 있은 뒤에 民이 있다. 稅가 있음은 자연의 定數이다. 그런데 現今 倭奴는 我國 5百年來의 根基를 문란하여 我君母를 殺戮하고 我皇上을 勒하고 我太子를 奪하며 我民 稅를 勒奪하기에 이르렀다. 國家가 있으되 그 實은 없는 것과 거의 같다. 君上에 正稅를 捧納함은 곧 由來 國民의 義務이다. 어찌 倭奴에 終歲勞動의 實을 보낼 理가 있는가. 我 秉彝 의 동포는 모두 誓心 27) 『暴徒招撫에 관한 編冊』(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번호 警務 88-31, 1908), 880쪽. 28) 위의 책, 880-883쪽. 29) 위의 책, 884쪽. 30) 위의 책, 883쪽. 31) 『폭도사』, 143쪽. 32) 위와 같음. 전해산의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강길원, 「海山 全垂鏞의 抗日鬪爭」(『歷史學報』 101<1984> ; 『義兵戰爭 硏究』 上<지식산업사, 1990>)을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