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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것이다. 다시 말해 김용구의 주도로 조직된 일심계는 의병모집에 대비한 선행조직체였음이 잘 나타난 다. 일심계의 명단에 포함된 64명중 19명은 실제 의병에 참여한 것을 확인된다. 20) 이로써 보건대, 일심 계는 창의의 사전조직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일심계원으로 기록되었다 할지 라도 실제 계원이었는지 잘 알 수 없는 인물들도 더러 눈에 띈다. 21) 따라서 일심계의 대부분이 의병과 관련이 있다거나 실제 계원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일심계원이었던 이대극(1875-1909) 역시 김용구와 동향출신이었다. 그는 대마면 남산리에서 출생 하였는데, 본관은 함평이다. 그의 이름은 淳植, 자는 英華였다.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 었던 것 같다. 22) 특히, 그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을 진압하는 守城將에 추대되어 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參奉을 제수받아 근무하다가, 세상일이 날로 어지러워지자 낙향 한 우국지사였다. 23) 그는 김용구가 이끄는 일심계 중심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영광읍 공격에 나섰다. 이때 김용구는 그 에게 의병을 맡기고 지리산에 웅거한 창평출신의 의병장 고광순을 만나러 떠났다. 24) 이대극은 의병 을 통솔하던 중 마침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에 합류하여 감기를 맡았던 것이다. 25) 그후 기삼연이 일 본군에 체포되어 피살당하자, 이대극은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大克”이란 號를 즐겨 사용하였 다. 일본을 크게 이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인데, 당시 사람들도 이름보다는 별칭인 대극으로 불렀 다. 26) 일제측 기록에는 흔히 “大局”이나 혹은 “大國”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대극 의병부대의 주요구성원으로는 선봉장 李伯謙, 좌익장 金南洙, 우익장 金寬燮, 포장 庾 子成, 후군장 李化三, 모사 魯化三, 참모 奉啓七·鄭珍玉·周賢叔·朱萬玉 등이었다. 이들은 의병의 훈련과 정예의 무기의 확보가 선결과제라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이대극은 영광의 石臺山을 근거지삼 아 무기의 제작에 진력하였다. 이후 이들은 영광의 불갑산과 장사산에 근거지를 형성하여 영광 함평 무장 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남의 서부 지역에서 기세를 올렸다. 또한 이들은 호남창의회 맹소의 선봉장인 김준과 연합전선을 펴며 이른바 犄 角之勢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대규모의 의병을 분 산시켜 소수의 정예의병으로 유격전을 감행하여 일제군경을 괴롭혔다. 그러던 중 이대극은 내분이 일 어나 鄭大洪에 의해 희생되고 말았다. 그는 영광을 중심으로 한 의병항쟁을 주도하다가 불행히도 같 은 의병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로 인해 그와 함께 투쟁한 의병 병사층은 다른 부대로 옮기거나, 의진 20) 一心契員은 총 74명인데, 영광출신 38명을 비롯하여 무장 장성 나주 고창 등에 거주하는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다(姜 吉遠, 「後隱 金容球의 抗日鬪爭」, 『人文論叢』<전북대, 1986>, 76쪽). 21) 강길원, 앞의 논문, 76쪽. 22) 고광렬, 「삼의사행장」, 『자료집』 3, 299쪽. 23) 위의 책, 300쪽. 하지만 동학농민전쟁 당시 공을 세운 자들의 포상기록이라 할 수 있는 「東學黨征討人錄」과 「甲午軍 功錄」에서는 그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다. 24) 김용구, 『의병실기』, 125쪽. 25) 위와 같음. 26) 고광렬, 「삼의사행장」, 『자료집』 3, 2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