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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아전을 충청도의 양반과 평안도의 기생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폐단이라 할 정도였다. 2) 이처럼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전라도의 농민들은 차라리 난리가 나서 세상이 엎어지면 좋겠다는 자조 섞인 한탄을 뱉어내었다. 한편으로는 『鄭鑑錄』과 같은 예언서의 眞人을 통해 세상을 구제하는 희망의 싹을 간절히 기대하였다. 그런데 대내외적 위기상황 속에서 농민의 불안을 해소해줄 새로운 사상이 형성되고 있었다. 다름 아닌 東學이 그것이다. 아다시피 동학은 水雲 崔濟愚(1824∼1864)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어려서 ‘복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그의 이름은 원래 濟宣이었다. 그는 1860년 음력 4월 5일(양 5. 25) 天命을 깨달은 후 이름을 濟愚로 바꿨다. 즉 어리석은 사람들을 구제하겠노라는 그의 신념을 이름으로 표방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1880년대 초에 간행된 『東經大全』과 『龍潭遺詞』에 전해진다. 『동경대전』의 「東學文」(훗날 「論學文」)에서, 그는 “道는 天道, 學은 東學”으로 “無極大道”를 표방하였다. 최제우는 총 3,450자의 한문체인 『동경대전』과 흔히 ‘歌詞 8篇’(총 917句)이라 불린 한글체의 『용담유사』는 대부분 남원 蛟龍山城 안의 隱寂庵에서 저술하였다. 그 중에 『용담유사』의 「칼노래」(劍訣)에,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 만고명장 어디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라고 노래했듯이, 변혁을 염원하는 내용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그는 「칼노래」를 위험시한 鄭雲龜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그는, “손으로 목검을 잡고 처음에는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나 마지막엔 칼춤을 추는 경지에 이르러 하늘로 한길 남짓 솟았다가 한참을 머물러 있다 내려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3) 거나, “칼춤을 추며 흉한 노래(칼노래-저자주)를 불러 퍼뜨리고 태평한 세상에서 난리를 도모하고자 은밀히 도당을 모은다” 4) 는 혐의로 체포되어 ‘平世思亂 暗地聚黨’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칼노래」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들의 변혁과 투쟁 의지를 고양시키는 역할을 했으리라 믿어진다. 이처럼 강력한 변혁의지를 내포한 동학 사상은 당시 폭정에 시달리며 불만이 가득찬 농민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을 것이다. 또한 선비의 체통조차 지키기 힘든 농촌지역 지식인들도 조정의 실정에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동학의 변혁사상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즉, 後天開闢論을 통하여 기존의 지배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동학은 정신적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의 변혁을 추동하는 사상으로 발전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이들은 天運의 순환을 강조하는 동학 사상을 통해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기원하고, 지상에 천국이 오리라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미 『정감록』과 같은 저술을 통해 말세사상과 진인설이 도처에서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를 이어 수탈과 천대를 당하던 농민들은 동학 교단이 강조하는 有無相資思想, 즉, 부유한 사람이 곤경에 처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교리를 통해 교인들의 2) 위의 책, 63-64쪽 3) 『備邊司謄錄』 哲宗 14년 계해 12월 20일조. 4) 『日省錄』 高宗 원년 갑자 2월 29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