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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분노를 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의 가혹한 수탈로 말미암아 살해된 것이라 하겠다. 7) 나주의 병은 안종수를 처단한 후에 이웃 군읍에도 의병에 참여를 호소하는 통문을 돌렸다. 그리하여 함평과 능주, 무안 등의 양반 유생들이 참여하였으며, 각 읍의 이족들도 가담하였다. 그 가 운데 영광의 향리인 丁相燮은 나주의병에 적극 동참하였다. 8) 영광출신의 정상섭이 나주의병에 가담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개화파 관리인 안종수의 피살과정과 나주의병의 본격적인 활동을 이족들이 주도한 것에서 기인할 것이다. 즉, 나주호장을 역임한 鄭錫珍을 비롯하여 金蒼均 金 晳鉉 父子 朴根郁 金錫均 朴化實 등 나주의병의 핵심인물들은 대부분 이족이었다. 이들과 정상섭은 매우 친근한 사이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때문에 정상섭이 나주의병의 주모자로 활동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나주의병은 인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동에 들어갔다. 먼저 창의의 목적이 勤王에 있음 을 알리고 개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함과 동시에 개화파와 일본세력의 제거 및 구제도의 회복 그 리고 국왕의 환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요컨대, 나주의병은 반개화·반침략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표 명한 것이다. 그러나 나주의병은 선유사 신기선의 해산지시로 결국 해산되었으며, 핵심인물인 정석진 을 비롯한 이족들이 대거 희생되었다. 영광출신인 정상섭 역시 주도세력으로 몰려 관군에 의해 처형 되고 말았다. 9) 그런데 장성과 나주의병은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그것은 국왕의 해산조칙 을 차마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기의병을 주도한 이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체로 유생들과 이족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기득권을 가진 보수적인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은 사상적으 로도 성리학적 세계관을 벗아날 수 없는 한계가 뚜렷한 계층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국왕의 명령에 바 로 해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 思考를 고수할 뿐만 아니라 근왕이념에도 충실히 따랐던 셈이다. 물론 전혀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훗날 호남창의회맹소의 대장이 되었던 奇三衍의 경우에는 “선비와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투쟁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의병의 불씨 가 꺼진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덮어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장성과 나 주에서 일어난 전기의병은 일단락되었다. 반개화·반침략의 근왕의병을 표방한 전라남도의 전기의병 이 종식된 것이다. 비록 의병이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국가의 위태로운 상황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조선의 정세는 더욱 악화일로에 있었다. 일제는 신식제도와 문물의 수용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정 부요로에 침투시켜 조선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해 갔다. 1897년 10월에 조선은 대한제국을 내외에 선 포하였지만, 그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전남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유생들은 처음에는 해산조칙을 수용하는 듯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 면서 일제에 강력히 대응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장성의병을 주도한 기우만의 경우에도 의병을 해산 7) 위의 책, 139-144쪽. 8) 申箕善, 「奉使日記」, 『陽園遺集』 下, 312쪽. 9)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