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page

19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최익현을 따르는 광양군의 백낙구, 장성군의 기우만, 창평군의 고광순 이항선 등이 관제개혁으로 실 직한 前 郡吏 등과 통모하여 구례군 중대사에 모여 총원 50여 명(총기 10여 정)으로써 다음날 5일에 거사, 구례로부터 광양군을 통과하여 7일 순천에 이르렀는데(『폭도사』, 21-22쪽). 백낙구 등이 실직한 관리들을 끌어들여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실직 관리들은 대체로 진주출신들이었다. 276) 이들은 진주에서 폭동을 도모하려다 백낙구와 만나게 되어 의병에 투신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순천에서 광주로 압송된 백낙구는 訊問을 받았다. 신문과정에서 그는 의병에 투신한 감회를 솔직하게 피력하였다. “슬프다. 오늘날 소위 大韓國은 누구의 대한국인가. 과거의 을미년에는 일본공사 三浦가 수차 마음대 로 군대를 풀어 대궐을 점거하니 萬國이 이를 듣고 失色하였으며, 팔도가 원수같이 애통해한 이래 12 년이 흘렀다. 위로는 復讐의 거의가 없고, 아래로는 수치를 씼는 논의가 없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제 伊藤博文이 더욱 모욕을 가하여 군대를 끌고 서울에 들어와 상하를 늑멸하고서 자칭 統監이라 한다. 그 統이란 것은 무엇이며 監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5백년 宗社와 삼천리 의 강토와 이천만의 동포가 이웃나라의 賊臣 伊藤에게 빼앗기는 바가 되었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 그려 분함을 외쳐보지도 못하고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가. 이에 백낙구는 스스로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여 힘껏 일본인 관리를 공격하여 국경 밖으로 내쫓고, 또한 이등박문을 사로잡아 의병장 최익현 등을 돌려받고자 하다가 시운이 불리하여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체포되었으니, 패군장이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에 사실대로 말하노라” 하였다더라(大韓每日申 報 1906년 12월7일자 「敗將口供」). 앞을 보지도 못한 장애인이었지만, 백낙구는 오로지 한국의 장래만을 걱정하였다. 그는, 한국이 누구의 나라인데 伊藤博文이 자칭 통감이라 하며, 삼천리 강산과 2천만 동포를 빼앗아 가느냐고 강력히 성토하였다. 요컨대, 그는 성리학적 명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勤王義兵보다는 保國義兵을 지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백낙구는 순천에서 활동중인 일본인들을 먼저 내쫓으려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277) 결국, 그는 15년형을 선고받아 1907년 5월에 완도군 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純宗의 特赦로 풀려났다. 278) 고금도에서 돌아온 그는 全州의 의병들과 합류하여 전북 泰仁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의 276)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14일자 「광양비요」와 萬歲報 11월 15일자 「광양비요」 참조. 277) 『구한국관보』 1907년 4월 23일자 참조. 278) 위의 책 1907년 5월 6일자 및 12월 3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