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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사들이거나 증동마을에서 직접 무기를 제작했다. 또한 양회일은 자신이 防盜組織의 都約長인 점을 이용하여 관으로부터 무기를 지급받거나, 민간에서 거둬들이기도 했다. 의병 병사층은 방도조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을 끌어들이거나 그가 가르쳤던 제자들로서 대체로 능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청장년들이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의병장 양회일은 임노복의 도움에 힘입은 바 컸다. 1906년 음력 10월 경 그는 증동 마을에 사는 임노복을 방문, 창의와 관련된 문제를 협의하였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판단되는 다음의 기록에 주목해 보자. 지난 1906년 겨울 음 10월경 양회일과 양공거는 백설을 무릅쓰고 나의 집을 방문하였다. 양회일은 호남의 유명한 집안이며 강개한 선비이다. 나의 부친 상영은 대대로 검소하고 집안이 당시 증리의 일 을 관장하여 한 집안의 번성을 이루었다. 양회일은 여러날 머물렀는데 임노복에게 요청하였다. (중 략) 양회일이 말하기를, “지금 섬나라 오랑캐 伊藤博文이 난을 일으켜 禽獸와 날짐승의 발자취가 나 라안에 가득찼다. 더욱이 인민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의 일은 날로 잘못되어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 려있다.” 임노복이 말하기를, “정말 그렇다. 이는 이른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빈 손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묵묵히 생각할 뿐이다. 만약 거사하려면 첫째 得人, 둘째 兵 器, 셋째 糧度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준비해야 한다. (중략).” 임모가 말하기를 “林興均의 賭租 百石 은 우리 집에서 관리를 하고 또한 그 형인 林昌模가 만명의 사내를 당하지 못할 용기를 가졌으니 내 가 당연히 추천하겠다. 梁公擧는 李光先을 추천했는데, 공거 역시 지략이 깊고 원대하였다. 이들은 수백명의 용사를 불러모았는데, 양회일은 동복군으로부터 병기 300정을 도모하였는데, 임의 지모에 의해 나온 계획이 많았다. 1906년 음 10월부터 1907년 봄 3월까지 병사를 여러달 길렀다. 정예의 훈 련을 하였고, 그 사이에 방법과 조절을 유지하였다. 나의 부친이 全信默 車在文 등 제씨를 데려왔으 며 모든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성심껏 도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07년 음력 3월초에 행군하 였다(林魯昌, 「梁與林魯福倡義實記」, 1946). 266) 우선 위의 기록을 통하여 쌍산의소의 본격적인 준비가 1906년 음력 10월부터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양회일이 명문 유생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증동마을을 중심으로 의병을 훈련시킬 생각을 갖고서 그곳의 실력자인 임노복을 찾아와 협조를 부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임노복은 양회일에게 쌍산의소의 方略으로서 첫째 得人, 둘째 兵器, 셋째 糧度(군량)를 갖출 것을 제시했다. 당시 황성신문이 사설을 통해 의병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器械·財政· 學術(전략)을 강조한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유생층이 주도하는 쌍산의소가 일본 제국주의를 이길 수 266) 林魯昌(1892-1966)은 林相永의 아들로서 1906년 당시 14,5세의 나이였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후 해방이 되면서 그는 두루마리로 된 간단한 창의실기를 남겼다. 한편, 임상영과 임노 복이 쌍산의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실은 『杏史實紀』에서도 확인된다(권 4, 「林相永」, 「梁烈默」, 「林參奉 魯福」 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