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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83 지켜보던 사람들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 예견하였다. 이와 같이 태인의병은 견고한 전투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활동에 나섰다가 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2. 和順의 雙山義所 雙山義所는 1906년 봄에 전남 화순군 이양면에서 일어난 한말 호남지방의 중기의병이다. 의병장 梁會一을 중심으로 1906년 음력 10월부터 이듬해 음력 3월까지 전라남도 화순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당시 전라남도에서 봉기한 대표적인 의진으로서 의병활동과 관련된 유적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특히, 쌍산의소의 유적은 한말의병의 실상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아 마침내 국가사적으로 지정받았다. 2-1) 쌍산의소의 조직과 활동 『舊韓國官報』 1907년 7월 11일자 「司法」조에 의하여 쌍산의소의 주요 구성원을 파악할 수 있다. 被告 梁會一은 供稱 以愚昧所致로 智不識時하고 忿不量力하여 恨時局之岌 嶪과 外國之侵漁가 愈往愈 甚하여 忿心이 繃中에 生不如死故로 被告가 蕩賣家産하여 以備軍需하고 自爲盟主 而以平安北道 定 州郡居 李光先으로 爲先鋒하고 寶城郡居 林洛均으로 爲中軍하고 南原郡居 魯應玄으로 爲後軍하고 驪州郡居 朴用溪로 爲謀士하고 其餘隨從諸徒는 皆是各處에서 臨時招募하여 陰曆三月分에 起自綾州 이에 따르면 쌍산의소는 양회일을 비롯한 李光先·林洛均·魯應玄·朴用溪 등이 결성하였다. 또한 『행사실기』에 의하면 林魯福·李秉華·林相永·崔基杓·安贊在 등도 쌍산의소의 결성에 적극적이었다. 전북 정읍에 거주하는 柳以三·柳化國 등도 의진 결성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활동중 피체되어 유배된 柳泰京·申泰煥·이윤선 등도 주요 관여자로 믿어진다. 이 가운데 쌍산의소를 조직한 핵심인물은 의병장 양회일이다. 주요 구성원들의 출신지는 능주·화순을 중심으로한 정읍·보성·남원 등이다. 따라서 쌍산의소는 대체로 전라도 사람들이 조직한 의병부대라 하겠다. 의병장 양회일은 1900년 초부터 창의하려 하였으나, 호응자가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 체결의 충격과 崔益鉉의 의병봉기에 영향을 받아 그는 본격적인 의병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먼저 기의하려는 뜻을 가족에게 알려 동의를 얻은 다음 동조자를 물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창평의 고광순· 장성의 기삼연 등과 각자 자신의 출신지를 배경으로 동시에 창의하기로 합의하였다. 犄 角之勢를 형성함으로써 일본군경의 힘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1907년 음 력 1월, 그 는 檄 告 文 을 사 방 에 보 내 어 의 병 을 본 격 적 으 로 모 집 하 였 다. 특 히, 梁烈默·李秉華 등을 파견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그리하여 이광선·노응현·임낙균 등을 비롯한 200여 명의 동조세력을 형성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병봉기에 필요한 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