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page

18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한편,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유명한 高敬命의 후손인 고광순은 태인의병에 참여하려다 좌절되자, 백낙구 등과 연합하여 의병을 도모하다가 탄로난 바 있었다. 259)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의병의 재기에 힘썼다. 마침내 1906년 음력 12월에 그는 자신의 一族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지리산 피아골의 鷰 谷寺에서 전사하였다. 그 역시 태인의병에서 영향받았음은 물론이다. 1907년 4월에 전남 능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杏史 梁會一도 면암의 영향을 받았다. 임실군수를 지낸 趙奎夏는 고향인 順天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전남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260) 태인의병에 가담했던 楊允淑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주로 순창을 중심으로 활발한 대일투쟁을 벌이다 1909년에 피체되어 이듬해에 순국하였다. 261) 任實出身의 靜齋 李錫庸과 海山 全垂鏞 등도 면암에게 私塾한 유생들로서 호남지역의 후기의병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경남 하동출신의 李光先(光彦)은 최익현의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262) 진주에서는 면암의 門人 盧應奎가 태인의병에 합류했다가 해산된 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6년 가을 충북 黃澗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월에 피체되었다. 263) 이상과 같이 최익현의 의병봉기는 호남지역의 의병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전국의 의병항쟁을 고조시킨 데에도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였다. 다시 말해 호남지역 중기의병의 선도적인 역할과 함께 중·후기의병의 활성화에 막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이제 태인의병의 의의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태인의병은 상소형태의 청원운동을 지양하면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였다는 점 264) 에서 후기의병의 방향을 제시해준 것으로 주목받을 만하다. 이제까지의 양반주도의 의병운동은 무력항쟁보다는 上疏運動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이 강했었다. 태인의병은 그러한 한계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장투쟁을 강화하려고 적극 노력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물론 태인의병의 한계도 없지 않다. 약 1천명이라는 규모의 의진을 결성하고서도 이렇다할 활동을 전개하지 못한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태인의병의 절반이 유생들이었으며, 무기를 소지한 자는 2∼300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태인의병은 포수를 적극 끌어들였지만 아직까지도 투쟁역량이 미흡하였다. 그런 까닭에 태인의병의 항쟁은 장기화하지 못하고 약 열흘만에 종식되었다. 태인의병에 가담한 유생출신 의병들은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으며, 총과 탄환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265) 유생중심의 태인의병을 259) 高光洵, 『鹿川遺稿』 卷 下, 「行狀」 「略傳」. 260) 홍영기, 『順天市史』 정치 사회편, 568-570쪽. 261) 『전북의병사』 하, 123-166쪽. 262) 『폭도사』, 23-25쪽. 263) 朴敏泳, 「愼菴 盧應奎의 晉州義兵 抗戰 硏究」, 『白山朴成壽敎授華甲紀念論叢』(1991), 216-217쪽. 264) 藤原葽 子, 앞의 논문, 3쪽. 265) 황현, 『매천야록』, 382쪽. 이로 말미암아 태인의병은 무기의 열세와 전투력이 미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