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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79 砲手의 확보에 치중하였다. 그것은 포수들의 전투능력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高龍鎭·楊允淑·蔡永贊·金松鉉 등이 각각 수십명의 포수를 데리고 합류하였다. 232) 이 가운데 채영찬은 순창의 三坊砲手로서 김병로의 권유로 참여하였다. 233) 그 밖에도 포수와 총기수선공으로서 적극 가담한 인물로는 嚴德祚·金士文·徐庸洙·姜鍾會·黃均昌·金甲述 등이다. 234) 태인의병이 포수를 확보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가진 의병은 약 2∼300명 정도였으며, 유생들은 오히려 500명을 넘어섰다. 235) 그리하여 태인의병은 봉기한지 일주일만에 9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약 1천명이나 되는 태인의병 모두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실정이다. 이 중에 태인의병의 해산시까지 남았던 이들이 주목된다. 이른바 ‘12義士’ 인데, 이들은 임병찬을 비롯한 태인의병의 지도부와 최익현의 門人들이다. 이 가운데 전라남도 출신이 7명이나 된다. 이들은 곡성과 능주·구례출신으로서 노사학파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들로 믿어진다. 나주 출신의 羅基德, 능주의 文達煥 梁在海, 곡성의 柳海容 趙泳善 趙愚植, 구례의 林顯周가 그들이다. 이들의 연령은 비교적 장년층에 해당하는 30-50대가 많은 편이다. 236) 면암과는 師弟關係임과 동시에 호남의 在地儒生들로서 사상적 성숙을 바탕으로한 동지적 결합체의 특성을 보인다. 237) 이들은 용추사 同盟錄에도 대부분 서명하였으며, 훗날의 국권회복운동에도 가담한 점으로 보아 신념이 강한 유생들임을 알 수 있다. 약 1천명의 태인의병이 활동에 들어가자, 정부와 일제는 곧바로 대응조치를 취하였다. 238) 먼저 일제는 全州警察顧問支部의 보좌관 加藤正典을 파견하고, 이어 수비대에 통보하여 小島 보조원을 무장시켜 한국인 巡檢 수 명과 헌병 2명, 수비대 6명 등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태인의병을 정찰할 목적으로 파견되었으나, 중과부적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 일제는 진위대를 동원하여 태인의병을 진압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일제는 軍部를 통하여 광주와 전주, 안동의 진위대까지 동원해서 태인의병을 진압케 하였다. 239) 그리하여 6월 11일(윤 4월 20일), 광주관찰사 李道宰는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는 高宗의 勅旨를 이들에게 전달하였으며,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급파되었다. 240) 그런데 광주와 남원의 진위대는 이도재와 梁漢奎의 영향으로 진압에 소극적이었다. 241) 이에 반하여 태인의병을 지휘하던 의병장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의 해산을 232) 최제학, 앞의 책, 64·84-86쪽과 임병찬, 앞의 책, 205-206쪽. 233) 김진배, 앞의 책, 238쪽. 234) 임병찬, 『의병항쟁일기』, 205-206쪽. 235) 송상도, 『騎驢隨筆』, 108쪽과 임병찬, 앞의 책, 82쪽. 236) 洪淳昶, 「淳昌十二義士에 관한 小考」, 『嶺南史學』 10·11 합집(1981), 7쪽. 237) 위와 같음. 238) 위의 책, 120-122쪽. 239) 大韓每日申報 1906년 6월 12일자 「派兵剿討」. 240) 임병찬, 앞의 책, 206쪽과 최제학, 앞의 책, 87-88쪽. 241) 황현, 『매천야록』, 3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