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page

17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擧義 날짜가 확정되자 최익현은 閔泳奎 편에 거병을 알리는 상소를 보냈다. 마침내 금월 13일에 前 樂安郡守 臣 林炳瓚을 보내어 먼저 義旗를 세워 동지를 장려하게 한 다음 北 으로 올라가서 편지를 띄워 伊藤博文·長谷川好道 등 여러 왜놈을 불러 각국 公·領事 및 우리 정부 여러 신하와 동석하게 하고 크게 담판하여 작년 10월의 勒約을 철회시키고, 각 부의 소위 顧問官이라 는 것을 없애고 모든 우리 국권을 침략하고 우리 민생을 박해하는 전후의 늑약을 만국의 공론에 회부 하여, 버릴 것을 버리고 고칠 것은 고쳐서 반드시 국가로 하여금 자주권을 잃지 않게 하고, 민생으로 하여금 魚肉의 화를 면하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최제학, 「면암선생창의전말」, 『자료집』 2, 64쪽).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면암은 의병을 일으켜 北上해서 각국의 대표와 조선정부의 대신이 모인 자리에서 일제 침략기관의 책임자와 담판할 계획이었다. 외교적 방법으로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되찾을 의도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의병의 군사력을 기반삼아 일본과 외교적 담판을 벌여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상소의 말미에서 최익현은 일제의 군사력이 강한 반면에 의병은 열세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가 주권을 되돌리지 않을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반일투쟁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임병찬은 비밀리에 전주를 비롯하여 순창·담양·창평·광주·김제·옥구 등지에 軍號를 통보하였다. 215) 태인과 가까운 인근지역에 의병에 가담할 날짜와 장소 등을 알린 것이다. 그런데 전기의병이 종식된 후에도 장성지역 노사학파의 유력한 유생들은 의병의 재봉기를 모색하였다. 기삼연·기우만 등이 그들로서, 이들은 이미 1896년에 장성의병을 주도한 바 있었다. 216) 이들 가운데 기삼연은 1902년 擧義를 도모하다가 체포된 바 있으며, 217) 기우만은 1905-1906년에 호남의병의 재기를 추진하였으나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218) 특히 기우만은 1906년 3월 의병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통문을 돌렸다. 大韓每日申報 1906년 3월 29일자 「義文刊佈」에 全羅南道에서 奇宇萬者가 義兵을 招募할 次로 通文을 板刻으로 刊出하여 各郡에 分播하였는데 該道 觀察使 朱錫冕氏가 一一收聚하여 內部로 上送하였다더라. 215) 위와 같음. 216) 申箕善, 「奉使日記」, 『申箕善全集』 下, 312쪽과 李炳壽, 「錦城正義錄」, 『자료집』 3, 75쪽 그리고 李相寔, 「韓末의 民族運動」, 『人文科學』 2(목포대, 1985), 99쪽. 217) 변상철 외, 앞의 책, 503쪽과 「湖南義兵將列傳」, 『자료집』 2, 627 · 632쪽과 홍순권, 『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史 硏究』(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99-100쪽과 286-287쪽 참조. 그런데 홍순권은, 기삼연이 1902년 2월에 체포 되었다고 하였으나(앞의 책, 100쪽), 실제로는 음력 5월 9일에 체포되었다(변상철 외, 앞의 책, 503쪽). 218) 大韓每日申報 1905년 9월 10일자, 같은 신문 1906년 3월 29일자, 「松沙集」, 『자료집』 3, 44쪽, 金允植, 『續陰晴 史』 下(국사편찬위원회, 1960), 172-17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