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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에 대하여 최익현은 注書 李浩鎔과도 창의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 이호용은 그에게 군사력을 강화하려면 먼저 전북 雲峰에서 활동하는 防盜組織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火賊에 대비하여 조직된 이들은 약 80명 규모에 900정의 총으로 무장하고서 매달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202) 이들은 아마도 동학농민전쟁 당시 朴鳳陽 등이 동학농민군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한 民堡軍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10여 년전 농민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낼 정도의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의병으로 끌어들인다면 전투력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었다. 태인의병의 수뇌부는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면에서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호용은 태인의 임병찬뿐만 아니라 운봉의 朴鳳陽과 협력하고, 나아가 경남 花開의 姜頭領과도 연합하여 영·호남이 동시에 거병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203) 이는 犄 角之勢를 추구하는 면암이 원하는 바였다. 요컨대 면암은 전북의 임병찬과 이호용 등과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였다. 204) 음력 4월 하순에도 최익현은 영·호남에 창의를 호소하는 글을 띄웠으며, 문인 고석진을 定山으로, 鄭時海는 영남으로 파견하는 등 동분서주하였다. 205) 그러나 큰 호응을 얻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직 면암의 문인 10여 명이 적극적으로 활동했을 뿐이다. 이를테면, 임병찬을 비롯한 최제학·고석진·吳在烈·曺在學·李養浩·崔學燁·李容吉·鄭時海 등이 그들이다. 206) 1-2) 태인의병의 결성과정과 담양 용추사 회동 임병찬은 면암의 위임을 받아 義陣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는 軍務를 총괄하며 의병의 모집과 군량의 비축 및 훈련 등에 힘을 쏟았다. 207) 또한 그는 각지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의 동조자와 군수물자 등을 수집하였다. 특히 山砲手의 규합에 힘을 기울여서 反東學軍으로 활동한 임실의 金松鉉, 순창 三坊砲手 蔡永贊, 태인의 포수를 지휘하는 金禹燮 등을 끌어들였다. 208) 그 밖에도 동학농민전쟁시 사용했던 총검을 수선하거나 타 지역의 포수를 가담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태인의병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에 유포된 통문이 皇城新聞 1906년 4월 5일자 「全報義通」에 실려 있다. 兵家勝敗는 不在於强弱利鈍이오. 惟智勇之將이 率忠義之卒하고 一心同力則 可以圖大事하나니 (중략) 軍律 衣制 器械 規例 等 諸條는 錄後發通 而會所及日字는 繼當知會할터이니 咸須預備하여 以待追通 202) 최제학, 앞의 책, 59쪽. 203) 위와 같음. 204) 위의 책, 58-59쪽. 205) 위의 책, 61쪽. 206) 위의 책, 58-61쪽. 207) 『면암집』 Ⅲ, 168쪽. 208) 임병찬, 앞의 책, 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