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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무엇보다 호남과는 직접적인 연고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면암을 추대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1860년대를 전후하여 최익현은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로 크게 부각되었다. 그는 제국주의 열강의 의도를 정확히 예견하는 상소를 거듭 올리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던 것이다. 예컨대, 「丙寅擬疏(1866)」를 비롯하여 「持斧伏 闕斥和議疏(1876)」·「請討逆復衣制疏(1895)」·「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1896)」·「請討五賊疏(190 5)」·「倡義討賊疏(1906)」 등을 통하여 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상소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그는 상소사건의 파문으로 濟州道(1873)와 黑山島(1876)에 두 차례나 유배되었으며, 1879년 2월에는 고향인 파주에 放逐되었다. 더욱이 일제는 그를 1905년 초부터 충남 定山에 주거를 제한시켰다. 그가 지속적으로 펼치던 상소운동이 門人과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전개한 상소운동은 호남지역 유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호남의 유생들 가운데 추종자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광주출신의 朴海量이 여러 번 왕래하며 師事받았을 뿐만 아니라 면암을 여러 가지로 도와 준 바 있었다. 189) 그리고 昌平의 金懿鉉, 順天의 趙鍾憲, 臨陂의 鄕吏 李弼世, 靈巖의 향리 河權默, 羅州의 향리 孫台孝 등도 유배지까지 찾아가 그의 門人이 되었다. 190) 또한 함평의 대표적인 유생인 金勳이 그의 유배지를 방문함으로써 서로 知友의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91) 그래서인지 면암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孤雲 崔致遠이 모셔진 광주의 芝山祠에 들러 참배하였으며, 박해량의 부친인 朴鼎鉉을 만나기도 하였다. 192) 이처럼 그는 호남의 유생들과 일찍부터 우호적인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계기가 되어 호남의 유생들이 최익현을 의병장에 추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최익현도 상소운동의 한계를 깨닫고서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을 고려하고 있었다. 193) 그는 日帝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유일한 전략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의 체결로 말미암아 크게 충격을 받고서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가 1906년 음력 閏 4월초에 올린 상소에서 거의를 준비한지 4∼5개월 정도되었다는 점 194) 과 1905년 음력 11월에 「布告八道士民」이란 글을 배포하고 이어 음력 12월 하순에 魯城의 闕里에서 강론한 내용 195) 등으로 미루어보아 그러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判書 李容元과 金鶴鎭, 觀察使 李道宰, 參判 李聖烈과 李南珪, 俛 宇 郭鍾錫과 艮齋 田愚 등과 같은 사회적 명망가들에게 글을 189) 『면암집』 Ⅲ, 69쪽. 190) 위의 책, 71쪽. 191) 위의 책, 78-79쪽. 192) 위의 책, 79쪽. 193) 藤原葽 子, 앞의 논문, 3쪽. 194) 『면암집』 Ⅲ, 170쪽. 195) 위의 책, 165-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