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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71 높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앙의 요직을 역임한 바 있고, 당시까지도 조선 정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즉, 민종식은 吏曹參判을 지낸 민씨 척족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최익현은 議政府 贊政을 역임한 고위관료로서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은 재야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타 지역의 의병부대와 대조적이라 하겠다. 그리고 양 義陣의 의병장은 관직을 그만둔 후 충청도 定山에 낙향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충청도는 尤庵 宋時烈以來 老論 政局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兩班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183) 이곳에 낙향한 이들이 조선의 지배계층인 양반을 근간으로 의진을 편성하였다는 점을 일제가 예사롭게 보았을 리 없다. 그것이 의병의 확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데다가 그로 말미암아 의병이 전국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하였을 것이다. 한편, 양 의진이 대규모의 의병부대를 형성한 점에서도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홍주의병과 태인의병은 각각 1천명 내외의 대규모 의진을 형성하였다. 한말의병 가운데 이러한 규모의 다른 의병부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두 의진이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된 또 다른 배경은 상호 연관성에서도 찾아진다. 태인의병은 홍주의병의 봉기에 자극받아 촉발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湖西와 湖南의 志士들은 그 부당성을 상소로 호소하는 한편,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였다. 충청도의 李偰 ·金福漢 등은 조약의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구금되었으나 1906년 2월 초에 석방되었다. 이들은 홍주의 유력한 인물인 安炳瓚과 정산에 낙향해있던 閔宗植에게 글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자고 권유하였다. 184) 이때를 전후해서 안병찬은 최익현에게 홍주에서 거병하자고 요청하였다. 185) 바로 이때 최익현은 호남의 선비들과 접촉중이었다. 186) 이무렵 민종식 등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는 湖西로 가려던 계획을 중지하고 호남을 향해 출발하였다. 187) 따라서 이상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이 일제가 이들을 주목하게된 배경이라 생각한다. 당시 호남지방은 동학농민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반일의병을 조직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전북 고창출신의 유생 高石鎭과 진안출신의 유생 崔濟學, 그리고 前職官僚인 林炳瓚 등이 의병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거병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다가 충남 定山에 머물던 勉菴 崔益鉉을 전라북도에 모셔와 의병장에 추대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188) 하지만 면암은 華西 李恒老의 門人인데다 경기도 파주출신으로 73세의 高齡이었다. 183) 유한철, 앞의 논문, 1쪽의 주 4 참조. 184) 유한철, 앞의 논문, 7쪽. 185) 崔濟學, 「勉菴先生倡義顚末」, 『자료집』 2, 57쪽. 186) 위의 책, 56-58쪽과 萬歲報 1906년 8월 17일자 「義魁處律宣告」. 187) 위의 책, 57쪽과 『면암집』 Ⅲ(민족문화추진회, 1967 ; 1989), 167쪽. 한편, 이태룡은 면암이 홍주의병이 일어나기 전에 호남으로 출발한 것으로 보았다(앞의 논문, 285쪽). 그러나 홍주의병이 1906년 3월 15일 전후에 봉기하였고 (유한철, 앞의 논문, 8쪽의 주 29 참조), 그 후에 호남으로 향했다는 면암의 門人 최제학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생각 된다(「면암선생창의전말」, 『자료집』 2, 57쪽). 188) 이러한 과정은 崔濟學이 남긴 「勉菴先生倡義顚末」(『자료집』 2, 1970)에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