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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선박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특히, 동학농민군의 방어시 가장 활약이 컸던 정석진이 擧義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135) 당시 의진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는 의병장으로 추대된 이학상, 답통을 장성에 전달한 유생 이원서·임긍규, 통문을 지은 이병수, 향교의 교임을 맡고 있던 오재수·송종희 등의 유생층과 해남군수 정석진·나주부 주사 박상수·참모 오득환·병교 승갑표 등을 비롯한 향리층을 들 수 있다. 요컨대, 나주의병은 양반 유생과 이족이 힘을 합하여 결성한 것이라 하겠다. 136) 倡義所는 椽吏廳에 설치되었으며 동맹록도 작성되었다. 137) 이 로 써 나 주 의 병 의 기 본 적 인 編 制 가 갖 추 어 지 게 된 것 이 다. 138) 양 반 유 생 들 은 대 체 로 義陣代表·文簿作成·參謀·軍糧을 담당하거나 義儒로 참여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김창균을 비롯한 이족들은 左右翼將을 비롯한 軍務를 주로 맡았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향리층이 군사적 실무를 맡아 승리한 것에서 연유한 듯하다. 그런데 나주의병의 주요 구성원들은 대체로 동학농민군에 맞서 싸운 反東學的 인물들이었다. 예컨대 정석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수성의 공로를 인정받아 해남군수에 임명된 인물이다. 따라서 나주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반동학적 성향의 양반 유생과 이족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나주의병을 주도한 핵심인물로는 정석진·김창균·김석현·박근욱·김석균·박화실·懲役徒 3인과 靈光 鄕吏 丁相燮 등 9명을 들 수 있다. 139) 특히, 정석진은 향교의 유생들에게 거의하자고 적극 주장하였으며, 장성의병이 나주에 오는 것을 방해하는 안종수의 처사를 강력히 비난하였다. 또한 그는 음력 2월 9일 부임지인 해남으로 떠나기에 앞서 나주향교에서 의병장 이학상 등 유생들과 만나 ‘급한 일이 있으면 밤중에라도 달려오겠다’ 140) 고 말할 정도로 의병봉기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그는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한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해남으로 떠난 직후에 그를 배웅했던 김창균·장길한 등 나주의 향리들이 안종수를 제거한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그러한 때문인지 그는 의병이 해산한 후 가장 먼저 체포되어 효수되었다. 141) 지금까지 나주의병의 경우 양반 유생들은 의진의 결성 과정에서 적극 참여하였으나,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향리층이 주도하였음을 알아보았다. 135) 정석진은 기우만의 격문에 대한 答通을 보낸 다음날인 음력 2월 5일 향교를 방문하여 倡義하자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70쪽). 그런데 그는 1896년 양력 1월 13일자로 해남군수에 임명되었지만 부임 하지 않고 나주에 머물러 있었다. 136) 慶州義兵의 경우에도 유생과 평민의 연합에 의해 조직된 전기의병의 특이한 사례로서 勤王的 성격이 강하였다고 한 다(조동걸, 「義兵運動의 韓國民族主義上의 位置」,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1989> ;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 運動史硏究』<지식산업사, 1989>, 56쪽의 각주 86 참조). 137) 이병수, 앞의 책, 75쪽. 138) 부록 나주의병 명단의 1)항 참조. 139) 申箕善, 「奉使日記」, 『申箕善全集』, 312쪽. 140)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73-74쪽. 141) 신기선, 「奉使日記」, 『신기선전집』 하, 3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