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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63 사람들에게 알릴 것과 校任과 公兄을 중심으로 의병에 가담할 명단을 작성하라고 촉구하였다. 128) 특히, 격문의 말미에서 기우만은 유생과 향리 두 세력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 향리층이 주도한 수성군의 활동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기우만의 격문이 1896년 음력 정월 말 나주에 도착함과 동시에 담양·창평·광주·장성·순창 등지에서도 통문이 전해졌다. 129) 나주의 양반 유생들과 향리들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즉, 기우만의 격문을 관내에 곧바로 전달한 후 음력 2월 1일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향교의 東齎에서 집회를 열었다. 130) 또한 이들은 충남 홍주로부터 復讐討賊을 위해 倡義하자는 통문을 받았다. 131) 이무렵 나주에서는 참서관 안종수를 중심으로 단발을 강제로 실시하는 등 개화정책을 강력히 추진중이었으나, 양반 유생과 향리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우만의 격문과 홍주의 통문이 도착되자, 나주의 유생들과 향리들이 倡義 준비를 서두르게 된 것이다. 1896년 음력 2월 2일 나주 유생 李承壽 등은 前 注書 李鶴相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前 注書 李鶴相이 일찍이 효자로 이름이 났고, 또 甲午年 동학 난리에 동지 羅秉斗와 함께 의거를 하 려고 하다가 마침 병에 걸려서 여러 달 동안 누워 있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나라 일이 위태함을 보고 밤낮으로 분격하고 있으니 이 사람이 會盟의 將이 될 만하다(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67쪽). 나주 유생들은 反東學的 입장을 堅持했던 전직 관료를 의병장에 추대한 것이다. 이어 음력 2월 4일 나주의 유생들은 기우만의 창의를 지지한다는 答通을 장성에 보내면서 “근왕하자고 이미 으뜸으로 외쳤으니 선비치고 누가 따르지 않으리오” 132) 라고 하며, 나주의 유생과 향리들은 장성의 의병봉기에 적극 찬성한다는 답통의 말미에 100여 명이 서명하였다. 133) 아울러 나주에서는 朝官·儒林·鄕吏·軍校들이 연합하여 의병봉기에 적극 호응하기로 합의하였다. 134) 다시 말해 나주의 양반유생과 중인계층이 신분적인 차이를 극복하고서 연합한 것이다. 이들은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수성군을 결성하여 농민군을 방어한 바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의병을 일으킬 때에도 쉽게 연합할 수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나주의 양반 유생과 향리들은 거병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먼저 城郭을 수리하여 외국 128)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66쪽. 129) 위의 책, 67 70쪽 참조. 130) 위의 책, 67쪽. 131) 변상철·변만기, 『봉서·봉남일기』, 269쪽. 132) 위의 책, 68-9쪽. 133) 答通은 儒生 李源緖·林肯圭, 吏族 朴祥壽·吳得煥·昇甲杓 등에 의해 長城義所에 전달되었다(이병수, 「금성정의 록」, 『자료집』 3, 1971, 70쪽). 한편, 박상수는 당시 나주부 主事였으며, 승갑표는 兵校였다(위와 같음 그리고 『國 譯 錦城邑誌』, 318쪽). 134)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