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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직면하였다. 이와 같은 포흠에 대한 추징도 이들이 의병을 주도하는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24) 이무렵 명성왕후시해사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졌고, 1896년 초에는 俄館播遷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당시 유생을 비롯한 보수적인 계층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개화파 관료인 이른바 ‘亂賊’의 제거와 일본 제국주의 세력, 즉 外勢를 몰아내자는 상소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나주의병의 결성은 장성의병의 봉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호남지방 최초로 장성의병을 일으킨 松沙 奇宇萬은 1895년 겨울에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125) 당시 그는 復讐討賊과 단발령의 철폐, 옛 제도의 복구 등을 주장하면서 전라도의 各邑이 상소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그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혀 예기치 못한 俄館播遷이 갑자기 발생한 것이다. 이에 기우만은 1896년 음력 정월에 勤王하기 위한 擧義를 도모하였다. 126) 이 과정에서 기우만의 격문이 나주향교에 전달되었다. 아래의 글이 그 일부인데, 당시의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으므로 다소 길지만 인용하고자 한다. 무릇 통곡밖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임금은 방금 別館에 옮겨 계시니 분노가 치밀어 차라리 죽고 싶을 뿐입니다. (중략) 지금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예로부터 조선 사람의 똑같은 원수입니다. 임진년의 일을 차마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중략) 國母를 弑害하고 임금을 협박하는 등 못할 짓이 없으니 綱常이 이미 무너졌습니다. 의복제도를 변경하고 머리를 깎으면서도 거리낌이 없 으니 野蠻이 분명합니다. (중략) 개화당이 이리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아 궁궐을 오랫동안 비우게 되 어도 적개심을 가진 용감한 신하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임금에 대한 호위가 허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략) 전국이 3백여 고을이나 되고, 우리 道만 하더라도 50여 고을인데, 국가를 위해 대대 로의 원수를 갚을 자가 아무도 없겠습니까. (중략)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의리는 이미 밝혔으니 통문이 도착하는 즉시 날짜를 정해서 각기 所管하는 州郡에서 大義에 호응하는 民兵을 모집하되, 선 비들은 규율을 받들고 吏校들은 그 두령에게 복종하십시오. 지휘와 절제는 스스로의 계획과 경륜에 따라 하고, 弓矢와 총칼을 준비하여 난폭한 자들을 쳐서 제거함으로써 나라의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 다. 그리하여 倭寇와 洋賊을 몰아내어 해외로부터의 수모를 영원히 근절시키기로 합시다(이병수, 「錦 城正義錄」 丙編, 『자료집』 3, 63-66쪽). 127)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우만은 고종의 환궁과 개화파의 처단, 옛 제도의 복구, 그리고 復讐討賊하기 위해 창의하였음을 밝혔다. 기우만은 이 격문을 나주를 비롯한 전라도 각 고을에 보냈으며, 境內에 격문을 두루 돌려 모든 124) 배항섭, 앞의 논문(2005), 205-207쪽. 125) 「松沙集」, 『자료집』 3, 23-27쪽 및 奇宇萬, 『松沙先生文集』 1, 278-284쪽 참조. 126) 「松沙集」, 『자료집』 3, 27쪽. 127) 이 격문은 1896년 음력 정월에 보낸 것으로, 『松沙先生文集』 2, 453-457쪽에도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