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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에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896년부터 1909년 사이에 나주의병 109) 을 주도한 인물들과 활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1896년에 일어난 나주의병을 주도한 인물들과 활동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다음으로 1907-1909년 사이에 나주의병을 주도한 인물들과 활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나주의병의 특징이 도출되기를 기대한다. 다만 이 글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밝히거나 참신한 관점을 제기하기 보다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나주의병의 흐름과 특징을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2-1) 나주의병의 주도인물과 결성과정 19세기 후반에 직면한 내우외환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신세나 다름없었다. 밖으로는 프랑스와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이른바 양요가 거듭되다가 일본이 일으킨 운요오호사건으로 조선은 강제개항을 당하였다. 안으로는 양반수취체제에 저항하는 임술농민항쟁이 삼남지방을 휩쓸었으며, 그러한 모순이 해결되지 않자 결국 동학농민군이 전국 각지에서 폐정개혁을 요구하였다. 19세기말 나주도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더욱이 나주는 그 이전인 1889년부터 3년동안 민폐를 시정해달라는 민란이 거듭 일어났다. 110) 나주목사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향리들의 농간과 작폐가 그 원인이었다. “나주민란 10년(羅擾十年)”이라 표현될 정도로 민란이 잦았던 관계로 정부는 1891년에 암행어사 李冕相을 파견하여 나주의 어수선한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주 향리층은 중앙정부 관료들로부터 “奸鄕”으로 지목됨으로써 이후 그들의 정치·사회적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다. 111) 하지만 3년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그러한 상황이 반전되었다. 戶長 鄭錫珍을 비롯한 나주 향리층은 閔種烈 목사의 지휘 하에 수성군을 조직하여 농민군과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인 끝에 나주 방어에 성공하였다. 당시 나주 향리층은 농민군과의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이들은 농민군 진압의 공적을 인정받아 「甲午軍功錄」에 수록되었는데, 그 군공록에는 나주관련 인사 25명중 향리층이 21명이나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112) 특히, 도통장으로서 군무를 총괄했던 정석진은 해남군수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나주의 향리층을 대표하여 중용된 것으로 보인다. 113) 나주의 향리층은 농민군 진압이후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였을 것이다. 한편, 나주는 1895년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전주·남원과 함께 109) 이 글에서 나주의병은 나주출신의 의병을 지칭한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다만, 당시에는 나주군과 남평군이 분리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나주시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당시 남평군을 포함시켰다. 110) 배항섭, 앞의 논문(2005), 195-197쪽. 111) 위와 같음. 112) 홍영기, 앞의 책, 129쪽의 각주 13 참조. 이하 1896년의 나주의병에 대한 서술은 홍영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113) 홍영기, 앞의 책, 130쪽. 정석진의 행적을 알려주는 『蘭坡遺稿』(1913)가 남아 있어 참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