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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기우만은 위의 격문을 나주를 비롯한 전라도 각 고을에 보냈으며, 境內에 격문을 두루 돌려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것과 校任과 公兄을 중심으로 의병에 가담할 명단을 작성하라고 제의하였다. 84) 특히, 격문의 말미에서 기우만은 유생과 향리 양자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당시 장성출신으로서 의병에 가담한 주요 인물로는 奇三衍·金翼中·奇宰·奇宇益·金良燮·奇周鉉·奇東觀 등을 들 수 있는데, 85) 이 가운데 기삼연·김익중·기재는 기정진의 제자들이었다. 마침내 장성에서는 1896년 음력 2월 7일 기우만의 주도로 장성향교를 都會所, 養士齋를 鄕會所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86) 기우만이 주도하는 장성의병은 勤王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87) 따라서 그는 의병을 ‘勤王之師’라 지칭하였으며, 88) 그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고광순 역시 자신들을 勤王義兵으로 인식하였다. 89) 요컨대, 이들은 성리학적 道를 지키려면 근왕의병을 일으켜 외세를 토벌하고 개화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호남지방의 전기의병은 근왕을 목표로 反開化 · 反侵略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3) 장성의병과 나주의병의 연합 이를 위해 장성의병은 결성된 지 4일만인 음력 2월 11일에 나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勤王北上하기 위해 나주에 내려와 나주향교에서 나주의병과 연합하였다. 당시 장성의병은 기우만을 비롯한 高光洵 奇參衍 등 200여 명의 규모였고, 나주의병의 규모 역시 장성의병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90) 이들이 나주향교에 집결하자, 주위로부터 “옛날 壬辰倭亂에 金健齋는 나주에서 창의하고, 高霽峰은 광주에서 창의했는데, 오늘날 그대들이 本州에서 창의하고 松沙는 장성에서 창의하였으니 진실로 추앙할 만하다” 91) 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양 義陣은 지휘권의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92) 즉, 장성의병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명문 유생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나주의병의 경우에는 대체로 이족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양 세력간에 신분상의 갈등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하지만 장성과 나주의 유생들이 중재에 나섬으로써 그러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리하여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은 湖南大義所, 李鶴相을 의병장으로 하는 나주의병은 羅州義所로 결정되었다. 음력 2월 14일 기우만과 이학상은 나주의 民庫에서 모든 將卒·義儒와 함께 의병으로서의 禮를 갖추었다. 아울러 이들은 임진왜란때 이름을 날린 金千鎰 의병장의 祠宇故址에 壇을 설치한 후 祭文을 바쳤고, 나주의 鎭山에 위치한 錦城堂에서 84)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66쪽. 85) 기우만, 「松沙集」, 『자료집』 3, 28쪽 및 『申箕善全集』 下(아세아문화사, 1981), 312쪽 참조. 86) 邊相轍 邊萬基 邊昇基, 『鳳棲 鳳南日記』(附 晦山日記)(국사편찬위원회, 1979), 277쪽. 87) 「丙申疏 二」, 『송사선생문집』 1, 287쪽. 88) 「三告列邑文」, 앞의 책, 466쪽 참조. 89) 「丙申疏」, 『鹿川遺稿』 卷 上 참조. 90)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145쪽. 91) 이병수, 「금성정의록」, 『자료집』 3, 75쪽. 92) 위의 책, 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