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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53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개된 위정척사운동은 재지양반과 유생들이 주도하였다. 호남지역의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핵심적인 인물을 든다면 蘆沙 奇正鎭(1798-1879)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蘆沙는 이렇다 할 師承關係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학문적 一家를 이루었다. 그는 이른바 蘆沙學派를 형성하였으며, 19세기 후반에 위정척사운동의 불을 지폈을 뿐만 아니라 한말 호남의병항쟁에 앞장선 인물들도 대부분 노사학파의 일원이었다 이제 한말 장성지역 노사학파의 의병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정진의 門人 594명 중에 장성출신은 광주(95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80명으로 집계된다. 69) 이 글에서는 노사의 장성지역 문인들이 한말의병의 주도하거나 활동한 사례를 집중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물론 한말 장성지역의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으나, 기존의 연구에서는 기정진의 문인들을 포함한 장성지역에서 전개된 의병활동을 밝히는데 노력해왔다. 70) 대체로 선행연구에서는 전기의병을 주도한 기우만과 후기의병 당시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기삼연의 활동을 주목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한 기정진의 제자들이 한말 호남지역 의병항쟁을 주도한 사실이 주목되었기 때문이다. 1-1) 장성의병의 결성 19세기 후반 조선은 구미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일본의 불법적인 침탈은 조선의 주권과 내정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를 좌우할 정도였다. 이에 대한 당시 지배계층의 대응은 소극적이거나 오히려 일본에 의지하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집권층의 일부세력은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근대적인 부국강병을 도모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재야의 유생들은 외세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서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러던 중 1894년 7월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불법 점거하며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 이에 항거하는 의병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어 일제가 明成王后 시해사건을 자행하고 모든 조선인에게 斷髮을 강요하자 전국에 걸쳐 의병이 봉기하였다. 그런데 전라도의 전기의병은 1895년 겨울부터 준비되었는데, 그 중심지는 장성과 나주였다. 장성지역의 의병 봉기는 노사 기정진의 문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松沙 奇宇萬(1846- 1916)은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그는 나주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71) 69)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87쪽의 각주 42 참조. 70) 한말 장성지역의 의병활동에 대한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金 湞, 「韓末 全南 長城의 義兵抗爭」, 『光州敎育大學 論文集』 21(1981). ----, 「韓末 全南의 丁未義兵」, 위의 책 24(1983). 李相寔, 「韓末의 民族運動--長城地方의 義兵活動을 中心 으로--」, 『人文科學』 2(木浦大, 1985). 71) 1896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쳐 나주에 보내진 기우만의 통문이 계기가 되어 나주에서도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李炳壽, 「錦城正義錄」 丙編,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63~7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