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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많다. 요컨대, 광주-전남 의병의 역사적 연원을 왜란과 호란 당시의 의병봉기에서 찾았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광주-전남 의병은 왜란이나 호란 당시 의병에 참여한 조상을 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의병장 고광순·기삼연·양회일·안규홍 등이 그러하다. 그 밖에도 상당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68) 한편, 1905년말 호남지방의 유림들은 『湖南節義錄』을 광주향교에서 간행했는데, 이때 전기·중기 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 최익현과 기우만이 각각 序文과 跋文을 써주었다. 『호남절의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의병으로 가담한 인물들의 행적을 전해주는 문헌이다. 이때 이러한 책이 다시 간행되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호남 유림의 왜란과 호란에 대한 정신적·역사적 계승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광주-전남 의병의 거의목표는 대략 세 시기로 나뉘어졌다. 1896년에 장성과 나주에서 일어난 의병은 성리학적 지배체제의 회복을 위해 勤王을 거의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인식은 大韓帝國의 제반 상황에 따라 변화하였다. 특히, 대한제국을 식민화하려는 일본에게 강제로 조약을 체결당한 1904∼5년을 고비로 크게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의병항쟁을 주도하던 인물들은 성리학적 체제의 회복보다는 오히려 국가적 위기 상황과 민족의 진로를 직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국가를 지키려는 의지, 즉 保國을 거의목표로 내세웠다. 한편, 후기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일제의 침략에 의해 생존권의 위협에 직면한 주민들의 생활에 눈을 돌렸다. 당시 의병들의 수많은 격문류에서 ‘愛國救民’이나 ‘保國安民’ 등과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 것은 단순히 구호라기 보다는 주민들의 절박한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믿어진다. 따라서 이 시기에 활동한 의병들은 우선 눈앞의 현실로 펼쳐진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켜주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주민들과 밀접한 연계를 맺고서 생존권 수호투쟁을 전개하였다. 즉, 安民을 거의목표로 삼아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물론, 세 시기에 걸쳐 의병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하여 시종일관 저항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의병봉기의 직접적 원인이었으므로 일제에 대한 反侵略을 목표로 하였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2장 전기의병의 결성과 활동 1. 장성의병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선은 內憂外患에 휩싸였다. 안으로는 三政의 문란에서 야기된 1862년의 농민항쟁이 삼남지방을 뒤흔들었고, 밖으로는 구미열강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도전에 68) 예를 들면, 쌍산의소의 경우 주요구성원 28명 가운데 약 10명 정도나 왜란이나 호란 당시 의병에 참여한 선조를 자랑스럽 게 내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