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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47 道東祠에서 倡義를 도모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52) 이후 그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려는 투쟁방법에 대하여 회의와 한계를 인식한 듯하다. 그는 1907년 중반 이후에 ‘外史를 編修하여 萬歲에 罪人으로 만드는 활동’에 관심을 돌렸다. 이는, 성리학적 褒貶의 기준에 입각한 修史者로서 의병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53) 요컨대, 기우만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자신의 논리를 時代的 狀況에 따라 전환해왔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성리학적 道를 지키기 위하여 勤王義兵을 일으켰으며, 그후에는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의병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무력투쟁의 한계를 절감하고서 성리학적 義理史觀에 입각한 역사의 編纂에 전념한 것이다. 54) 한편, 최익현은 호남지방 중기의병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謹告八道士民書 (布告八道士民)」는 이 지역의 유생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55) 그는 이 글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한편, 乙巳五賊의 처단 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는, 종래 보수적인 유생들이 주장하던 華夷論과는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즉, 그는 日帝의 경제적 침탈의 實狀과 예견되는 폐단, 그리고 乙巳五賊에 대한 단죄 등과 같은 현실과 밀접한 내용들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56) 그는 春秋의 의리사상에 의거하여 ‘누구나 亂臣賊子를 죽일 수 있다’는 논리를 폈으며, 結稅의 納付 거부와 外國文物의 사용 금지 등을 주장하였다. 민족적 자각과 국가의 보존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에 대하여 국민들도 적극 동조하였다. 全州出身의 白樂九는 앞을 보지 못하는 盲人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1906년 11월에 求禮와 光陽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被逮된 이후 그는 倡義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述懷하였다. 今日의 所謂 大韓國은 何人의 大韓國인가 (중략) 現今 伊藤博文이 益加侮辱하여 率兵入京에 鉗勒上下 하고 自稱 統監하니 其統之者 何며 監之者 何也오. 我國 五百年之宗社와 三千里之疆土와 二千萬之同 胞가 擧爲隣國賊臣 伊藤之所奪하되 噤 口縮首하여 不能聲叫其憤而待斃乎아. 於是乎 白樂九는 自不量 力하고 招呼同志하며 募集兵丁하야 力攻日官之來留者하여 盡逐境外하고 且擒伊藤博文(뒤바보, 「義 兵傳」, 『義兵戰爭硏究』 上, 64쪽). 위에서 보이듯이,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협하는 일제를 몰아내기 위하여 거의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쌍산의소를 결성한 의병장 梁會一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恨時局之岌 嶪 52) 위와 같음. 53) 위의 책, 51 56쪽 참조. 54) 그는 1909년부터 광주-전남 의병의 傳記인 「湖南義士列傳」를 찬술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호남의병장열전」(『자료집』 2 에 所收)으로 소개되었다. 55) 『暴徒史』, 20-21쪽 참조. 56) 『국역 면암집』(민족문화추진회, 1978), 212-218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