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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이준에 대해 당시 국민들은 ‘할복자결’로 미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상당수의 네덜란드인들도 이준의 장례식을 적극 도와줌으로써 그의 주검은 헤이그에 묻혔다. 13) 헤이그평화회의 이후에도 이상설과 이위종은 구미 각국을 순회하며 일제의 불법성을 폭로함은 물론 동아시아의 영구평화를 위한 한국의 영세중립을 주장하였다. 14) 헤이그특사의 활동으로 가장 곤경에 처한 인물은 통감 이등박문이었다. 그는 외무성에 특사의 파견이 과연 고종의 칙명에 의한 것인지를 문의하는 한편, 앞으로의 대한정책의 방향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하였다. 15) 이에 따라 일본 수상은 7월 12일 이등 통감에게 한국 내정의 전권을 장악하는 방안을 통보하였다. 첫째 한국 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할 것. 둘째 한국정부의 행정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실행하게 할 것. 셋째 대신이하 중요 관리를 일본인으로 임명하거나 또는 통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게 할 것 등이었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었으므로 일제는 외무대신 林董을 한국에 파견하여 통감과 긴밀히 협의하여 처리토록 하였다. 이등은 이완용을 불러 ‘일본은 한국에 宣戰할 권리가 있으니, 당신이 책임을 지고 황제의 결단을 얻어내라’고 협박하였다. 16) 이에 이완용 등은 여러 차례 내각회의를 거듭하며 고종의 퇴위를 기정사실화하였다. 이들은 고종에게 이번 사태의 수습방안으로 을사조약문에 어새를 찍어 추인할 것, 섭정을 둘 것, 황제가 동경에 가서 사죄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이들은 연일 내각회의를 열어 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끈질기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마침내 고종은 이등 통감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한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입궐한 이등은 퇴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피하였다. 그 문제는 조선의 국내 사정이라는 것이었다. 매국 대신들의 밤샘 강요와 협박에 시달린 고종은 퇴위하기로 결심하고서 1907년 7월 19일 오전 3시에 ‘슬프도다. 짐이 왕위에 오른 지 어언 44해가 지났노라. (중략) 이에 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내용의 조칙을 발표하였다. 고종의 퇴위가 아니라 황태자의 섭정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완용과 이등은 이를 讓位로 둔갑시켜 양위식과 즉위식을 잇따라 거행함으로써 대리가 아닌 양위를 공식화해버렸다. 당시 일제는 고종의 퇴위를 관철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살벌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고종의 거처인 경운궁(현 덕수궁)의 대한문 근처에 무장한 일본군을 배치하였다. 또한 圜丘壇 앞에 1개 대대, 倭城臺에는 포병진지를 구축하여 계엄을 실시하였다. 고종황제의 퇴위를 압박하기 위한 야만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한편, 7월 19일 조칙이 발표되자, 수많은 시민과 유생들이 대한문 앞에 모여 통곡하였다. 이 가운데 기독교청년회 회원들은 대한문 광장에서 감동적인 연설로 시민들을 불러 모아 매국노와 일본을 13) 이준의 유해는 일제 강점기에 헤이그의 공동묘지에 묻혀있었으나 최근에 국내로 봉환하여 안장하였다. 무덤이 있던 자리 에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그 인근에 광복50주년을 기념하여 이준열사기념관을 건립하여 유럽지역 독립운동의 발상지 로 기리고 있다. 14) 『한국사』 43(국사편찬위원회, 1999), 74쪽. 15) 『高宗時代史』 六(국사편찬위원회, 1972), 634쪽. 16) 위의 책, 6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