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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의 淚를 그다지 泣下치 아니련만 그 결심이 차에 在치 못함은 어쩜이뇨. 역사상 유물인 방면으로 보 면 그럴 듯도 하고 또 賣國奴臣輩에 대충(對衝)하여 보든지 肉袋飯囊的 생애로 구차 偸生한 그들과 비교하여 보든지 하면 雲泥의 판별이 잇고 누구나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같은 인민으로 같은 시대 같은 경우에 처하여 어떤 이는 이렇게 죽고 어떤 이는 저렇게 죽는 것은 사 생관이 제각금 殊異하고 그를 따라 本務다 하는 방면에 저절로 분기점이 생김은 사실이었다. 이때 거 의한 그네들은 生하여서는 義人이 되고 死하여서는 義鬼가 되라는 그 결심 또는 ‘生是苟生生且辱 死 於當死死爲榮’이라는 主旨로써 당당한 義旗를 擧한 것이었다(『독립신문』 1920년 5월 1일자). 계봉우는 위의 인용문에서 자결순국이나 거의항전 등 두 가지 방안을 모두 의리에 합치하는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인정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생(死生)이 모두 의리를 따르고, 나아가 구차스러운 삶보다 영광스런 죽음을 지향했던 거의항전 방안이 단순한 자결순국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3. 후기의병의 거의배경 (1) 헤이그특사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 1907년 6월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사건이 유럽에서 발생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하여 조선을 식민화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폭로했던 것이다. 시시각각 뻗혀오는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던 고종은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는 이른바 외교론에 주목하였다. 마침 구미열강을 비롯한 44개국 대표 225명이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 모여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는 1907년 6월 25일부터 10월 18일까지 개최되었다. 고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국제사회에 호소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이에 앞서 을사조약의 체결에도 부정적이었으며, 그 조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고문인 헐버트(H.B. Hulbert)를 미국 정부에 특사로 파견하여 협조를 요청한 바 있었다. 그후 고종은 의병항쟁을 은밀히 고무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내시(內侍)를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명(密命)을 전달한 바 있으며, 애국계몽운동 계열에도 상당한 자금을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11) 하지만 고종은 의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한 번 외교론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그는 비밀리에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특사로는 전 의정부 참찬 李相卨, 전 평리원 판사 李儁, 전 在露韓國公使館 서기관 李瑋鍾 3인이 선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국내에서 활동 중이던 11) 홍영기, 『한말 후기의병』(독립기념관, 2009), 9-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