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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133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병이 총을 쏘며 광화문에 들어오다. 우리 위병들이 항거하여 약간의 살상자가 났으나 막아내지 못하다. 연대장 홍계훈이 꾸짖었으나 곧 피살되다. 일병들이 곧 내전에 들 어오다. 일본 사관의 지휘로 정렬하여 각 문을 지켜 자객을 돕게 하다. (중략) 자객들이 각 방을 모두 수색하여 끝내 왕후를 시해하고 비단이불로 싸서 송판에 올려 녹원의 수풀 속으로 옮겨 장작을 쌓고 석유를 뿌려 불태우다(박은식, 『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上海, 1920, 7-8쪽). 위와 같이 비참하게 희생된 명성왕후 시해소식을 접한 조선인들은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일제는 자신들과 무관한 사건이라고 시치미를 뗐으며, 친일내각은 오히려 폐비조칙을 내려 시해를 정당화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들의 의기가 폭발하였다. 전 참판 李建昌 등 우국지사들이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잇달아 상소를 올렸으며, 영흥부사 이남규는 상소를 통해 관직을 사직하며 거족적으로 復讐討賊에 나서자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음력 9월 충남 유성에서 文錫鳳이 國讐報復을 기치로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편, 전라도에서 전기의병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 배경으로는 斷髮令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단발령은 명성왕후시해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3개월만이 지난 1895년 11월 15일 단행되었다. 그 충격이 상상외로 컸음을 아래의 기록이 말해준다. 단발령이 내린 후에는 哭聲이 하늘을 진동했다. 사람마다 분노하여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다. 형세가 장차 격변하자, 왜놈들이 군대를 무장시켜 대기시켰다. (중략) 서울에 온 시골사람들은 문밖을 나섰 다가 상투를 잘리면 모두 그 상투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통곡을 하며 성을 빠져 나갔다. (중략) 錦江 을 차단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머리를 억지로 깎으므로, 길을 다니는 행인의 발길이 거의 끊기었다. 이때부터 온 나라가 솥처럼 들끓었으며,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黃玹, 『梅泉野錄』, 191-192쪽). 위의 인용문에서 단발령이 의병봉기의 가장 큰 원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남 장성의 松沙 奇宇萬(1846-1916)은,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머리를 깎고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깎고 망하는 것이 나으며, 사람치고 죽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것이 낫다” 5) 라고 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다른 지역의 경우에도 이러한 인식은 크게 다를 바 없었으며, 단발령이 전기의병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6) 이로써 보건대 상투의 보존은 곧 조선의 전통에 대한 수호이자, 개화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항거의 표시였다. 즉, 성리학적 전통을 지키려는 의식이 매우 강했던 것이다. 이들의 保髮論이 5) 奇宇萬, 「松沙集」, 『독립운동사자료집』 3(1971), 25-27쪽 참조. 6) 전기의병의 격문류 50건을 분석한 권영배는 단발령직후에 발표된 격문이 37건으로 74%나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았 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토대로 전기의병의 결정적 동인이 단발령이었다고 주장하였다(『檄文類를 통해본 舊韓末 義兵抗 爭의 性格』<경북대 박사학위논문, 1995>, 23-5·43쪽). 한편, 오영섭도 단발령이 전기의병운동을 촉발시킨 근본요인으로 보았다(『華西學派의 思想과 民族運動』(국학자료원, 1999), 114-1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