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page

13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다시 의병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를 中期義兵(1904-1907.7)이라 한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07년 중반 일제는 高宗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수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와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더 나아가 도시와 농어촌의 경제적 토대를 급속히 잠식하였다. 일제의 전면적 침탈에 의한 민족적 위기를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이를 後期義兵이라 한다. 이들은 일제가 단행한 이른바 ‘南韓暴徒大討伐作戰(1909.9- 10월)’에 의해 기세를 크게 꺾였다. 이처럼 의병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투쟁한 세력이다. 이들은 대략 1895년부터 1915년까지 약 20년 동안 전국의 산과 들을 누비며 활동하였다. 특히, 1907년 이후 의병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를 ‘전쟁’이라 일컫기도 한다. 2) 1910년 8월의 庚戌國恥를 전후하여 국내의 의병활동은 비밀결사운동으로 전환되거나 해외의 독립운동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를 전환기의병이라 한다. 따라서 의병항쟁은 네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시기별 배경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는 전환기의병의 경우 독립운동으로 전환해갔으므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1. 전기의병의 거의배경 전기의병은 일반적으로 명성왕후시해사건(1895.10.7)과 단발령(12.30)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침범사건(이른바 ‘갑오변란’)에 항거한 의병이 처음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3) 경상북도 안동에서 서상철 등이 경복궁을 불법으로 점령한 후 친일정권을 수립한 것에서 항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사건은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는데, 전기의병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비롯된 것이나, 전라도 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상황이었다. 광주-전남의 전기의병은 명성왕후시해사건과 단발령 이후에 본격적으로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명성왕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일제는 친러정책의 핵심인물이었던 명성왕후를 제거함으로써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기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주한일본공사였던 井上馨과 三浦梧樓의 치밀한 계획하에 추진되었다. 4) 이들은 일본군을 동원하여 건청궁을 포위하고 명성왕후를 찾아내어 잔혹하게 살해한 것이다. 이를 저지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시위대 연대장이었던 洪啓薰과 宮女들도 피살되었다. 2) 대한매일신보(한글판) 1907년 9월 5일자 「한국안에 젼쟁」 참조. 3) 김상기, 「朝鮮末 甲午義兵戰爭의 展開와 性格」,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 1989 ; 『韓末義兵硏究』 제3장 「韓末 甲午義兵의 抗日鬪爭」(일조각, 1997). 4) 김상기, 『한말 전기의병』(독립기념관, 2009), 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