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page

한말의병 131 제2부 광주-전남의 의병항쟁 제1장 광주-전남 의병의 거의배경과 거의목표 19세기 후반부터 朝鮮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직면하였다. 프랑스와 미국이 연거푸 江華島를 침공하였으며, 일본은 강제 개항에 이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유발하여 동아시아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당시 조선은 대내적으로도 양반지배체제의 모순이 심화됨으로써 잦은 농민항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선은 反封建의 계급모순과 反帝의 민족모순을 동시에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실과 관료들은 위기를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틈타 일본은 식민지배를 목표로 경복궁을 강점(‘甲午倭變’ ; 1894.7.23)하거나, 명성왕후를 살해한 사건(‘乙未事變’ ; 1895. 10. 7)을 자행하는 등 조선의 주권을 유린하였다. 이어 일본은 친일정권을 내세워 단발령(斷髮令, 1895.12.30)과 衣冠制度의 개정(1896.1.11) 등과 같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개혁을 추진하려다 거센 반발을 받았다. 1896년 2월에 俄館播遷이 발생하게 된 배경도 사실은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한 왕실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제의 침략정책에 저항하는 의병이 1894년 후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를 흔히 前期義兵(1895-1896)이라 부른다. 1) 이후 일본의 국권침탈은 대한제국이 패망한 1910년까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일제는 1904년 2월이후 군대를 국내에 주둔시키고, 이어 8월에는 일본인 顧問들이 한국의 내정을 장악함으로써 이른바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1905년 11월에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였으며, 일제의 통치를 상징하는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실권은 일본인 통감의 수중에 넘어감으로써 대한제국은 일제의 ‘보호’를 받는 半植民地國家로 전락하고 말았다. 1904-5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1) 19세기말 이후의 의병전쟁에 대해서는 2-5단계로 시기구분을 해왔다. 다만, 연구자마다 그 명칭을 달리 사용함으로써 다소 혼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예컨대, ‘을미-을사-정미 의병’, ‘제1차(제1기)-제4차(제4기) 의병’, 혹은 ‘19세기 말-20세기초 의병’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상태이나, 이 글에서는 점차 보편화되고 있는 ‘전기-중 기-후기-전환기 의병’이란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