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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29 희생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전라도에서 활동한 농민군들이 가장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일본군 後備步兵 제19대대 소속의 한 병사는, “(해남의) 잔존 동학 무리 일부인 7명을 붙잡아와 오늘(1895년 1월31일) 성 바깥 밭 가운데에 일렬로 세워놓고 총검을 부착한 뒤 모리타(森田) 一等 軍曹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찔러 죽였다. 이를 구경한 韓人들과 統營 병사들이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경악했다” 425) 라고 있듯이, 그들이 농민군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처형했는지 알 수 있다. 농민군 포로의 집결지였던 나주에서는 일본군과 민포군에 의해 매일 12명 이상 103명의 농민군이 희생되었으며, 그 주검이 680명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악취가 진동했고, 땅은 하얗게 사람 기름으로 얼어붙었다 한다. 426) 당시 일본군은 ‘銃殺 突殺 427) 打殺 燒殺’ 등 참혹한 방법으로 농민군을 학살하였다. 428) 인용문에 있듯이 오지영은 일본군을 비롯한 관군 등은 농민군의 재산약탈과 가옥방화뿐만 아니라 농민군을 참혹하게 학살했음을 증언하였다. 심지어 그들의 반인륜적 부녀 강탈과 능욕 행위는 입에 담기조차 참담하여 차마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말미암아 농민군은 최소한 3만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429) 이로써 보건대 앞서 농민군 3,40만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라는 오지영의 추정이 과장된 수치라 하더라도 황현의 3만6천명설은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상과 같이 광주-전남의 동학농민혁명은 크게 5개 권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알아보았다. 동학농민혁명이 군현 단위의 우발적 일회적 농민항쟁을 극복하고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는 동학의 수용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광주-전남의 경우 동학의 수용과 제1차 동학농민혁명은 대체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거쳤다. 특히 영광 함평 장성 등 전남 서부지역의 농민군은 전봉준의 우회전술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전남 서부 지역은 그 이후까지 전봉준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활동하였다. 반면에 전남 동부 지역의 농민군은 전라좌도를 관할하던 김개남의 직접적인 영향아래에서 일본군의 서진을 막고 경남 서부지역의 세력 확산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전남 남부-연해 지역은 농민군의 마지막 보루로서 최후항쟁지라는 특징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군의 희생이 엄청났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농민군의 희생이 컸던 까닭은 농민군의 화력의 열세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수성군과 관군 그리고 일본군의 잔혹한 탄압에 기인한 것이었다. 425) 楠 美代吉, 「明治27年 日淸交戰 從軍日誌」(필사본) ; 한겨레신문 2013년 7월 23일자, 「‘동학농민 학살’ 일본병사 일기 첫 공개」. 426) 위와 같음. 427) 일본군이 총부리에 軍刀를 부착하고 돌격하여 찔러 죽이는 방법을 의미한다. 428) 박맹수,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제1중대의 동학농민군 학살」(미발표 원고) 참조. 이 자리를 빌어 원고와 번역문 초 고를 제공해주신 박맹수 교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429)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