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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관군에 대한 일본군의 인식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래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러한 점을 알 수 있다. 좌우 양 선봉의 한병(韓兵)은 가는 곳마다 민가에 들어가 첫째 먹을 것, 둘째 담배, 셋째 버선, 그 다 음에는 내의(襦袢), 또 다음에는 말할 것 없이 금전을 약탈했다. 특히 가장 질린 것은 그들이 행군중 마음대로 대열에서 빠져나가 민가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는 값도 치루지 않고 떠나고 밤이 되어서는 상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산책을 하는 것이다. 또 혹 마을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닭을 빼앗 아 죽이는 것 같은 행동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예사로운 일로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은 것 같았 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56쪽). 좌우 선봉진에 속한 관군들이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주로 식량과 담배, 피복과 금전 등을 일상적으로 빼앗았다는 것이다. 관군의 이러한 행태가 백성들이 등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믿어진다. 더욱이 수세에 몰린 이후 관군을 비롯한 수성군, 그리고 일본군의 탄압은 갈수록 강화되었다. 그들은 잔혹하기 그지없는 방법으로 농민군의 섬멸에 앞장섰다. 아래에서 그러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甲午 12월부터 朝鮮 南方은 官兵과 日兵의 天地가 되고 말았었다. 洞里洞里마다 殺氣가 衝天하고 流 血이 滿地하였었다. 이 때에 있어서 朝鮮 사람의 思想은 또다시 두 쪽으로 갈려 있음을 보게 되었었 다. 한 便으로는 官吏 兩斑 富者 儒林 小吏 使卒 等과 東學軍은 모두 政府黨이 되어 官兵과 日兵에게 한데 섞여 혹은 守城軍 혹은 民包軍 같은 것을 組織하여 東學軍 잡이에 날뛰었고 其他로 만만한 百姓 들은 맘이라도 東學軍 便으로 同情을 두었었다. 官吏나 兩斑이나 小吏나 使卒輩로서 東學에 參與했 던 자들은 一朝에 豹變하여 다시 東學軍의 怨讎 가 되었었다. 제 頭目이나 제 將師나 제 親舊를 잡아 다 주고 베살깨나 얻은 놈들은 모두 다 托名 東學軍 놈들이다. 東學軍으로서 官兵 日兵 守城軍 民包軍에게 當한 慘殺 光景은 이러하였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일, 칼로 찔러 죽이는 일, 몽동이로 때려 죽이는 일, 불에 태워 죽이는 일, 목을 옭아 죽이는 일, 땅에 파 묻어 죽이는 일,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일, 물에 집어 넣어 죽이는 일 等 가지 各色으로 죽이는 慘景 은 日月도 빛이 없고 草木도 실품을 머금었다. 千里江山이 다 같이 당한 일이지만 그 중에도 가장 慘 酷한 곳이 全羅道가 第一에 居하였고, 忠淸道가 그 다음이며 또는 慶尙 江原 京畿 黃海 等 各 道에도 殺害가 많았었다. 前後 被害者를 計算하면 무릇 三,四十萬의 多數에 達하였고 東學軍의 財産은 모두 官吏의 것이 되었고 家屋은 다 불 속에 들어갔으며 其他 婦女强奪 凌辱 等은 차마 못다 記錄한다(오 지영, 『동학사』, 505-506쪽). 위의 인용문에 제시되었듯이, 농민군이 관군을 비롯한 수성군, 일본군에 의해 얼마나 처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