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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27 당시 농민군들은 한겨울의 몹시 추운 날씨와 적대적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목숨을 잃거나 아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듯이 농민군의 가장 많이 희생된 지역은 전남 동부지역의 광양 순천 여수, 서부지역의 영광 무안, 남부지역의 장흥 보성, 북부지역의 담양, 중부지역의 나주 화순 등이었다. 그만큼 이 지역 농민군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과 비례하여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희생을 남긴 채 붕괴되고 말았다. 격렬한 전쟁의 끄트머리에서는 잔인한 보복과 응징이 곳곳에서 진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일본군과 관군의 진압이 시작된 이래 농민군은 무려 36,0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423) 아마도 이 수치는 전라도 농민군의 피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 수많은 농민들이 동학의 정신과 농민군 지도부에 호응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민군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의로운 군대라고 생각하여 지지하였다는 일본측 보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424) 심지어 농민군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던 황현조차도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관군은) 행군을 하게 되면 연도에서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였고, 점포를 망가뜨리고 상인의 물건을 겁탈하는가 하면, 마을로 가득 몰려가니 닭이나 개가 남아나는 게 없었기에 백성들은 한결같이 이를 갈면서도 겁이 나 피했다. (중략) 적(농민군-저자주)은 관군의 소행과는 반대로 하기에 힘써 백성들 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게끔 명령을 내려 조금도 이를 어기지 않으면서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며 행군하였다. 이때 관군이나 도적들 양 진영은 모두 양식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민간 으로부터 먹을 것을 구하여 힘들게 옮겨와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적들의 진영에는 음식을 담은 광주 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관군은 굶주린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번역 오하기문』, 79∼80쪽) 민간에 대한 약탈은 관군이 주도한 반면, 농민군은 오히려 백성들의 폐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농민군의 진영에는 백성들이 가져다 준 식량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농민층의 농민군 지지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농민군들은 주로 관청의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와 장부를 불태우거나, 관청의 무기와 재물을 빼앗았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먹을 것과 짚신만을 요구할 뿐 부녀자나 재물을 약탈하지 않았다. 이처럼 농민군은 자신들이 표방한대로 보국안민적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민군의 안민활동이 강화되자, 농민군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크게 늘어났다. 농민군에 한 번 들어오면 마치 별천지에 든 것처럼 여겼으며, 귀가하여 가래와 호미를 드는 일이나 가정을 돌보는 일은 내키지 않아 할 정도였다고 한다. 423) 황현, 『번역 오하기문』, 307쪽. 424) 『주한일본공사관기록』 3, 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