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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23 평등사회를 지향하였다. 즉, “서로 대하는 예가 매우 공손하였으며 신분의 귀천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평등한 예로 대했으며, 비록 접주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서 남보다 뒤쳐지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정성껏 섬겼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들이 양반을 미워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는 것이나, 서로를 “접장”이라 부르며 평민과 양반이 평등하게 대했다는 점에서 평등사회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황현의 『오하기문』에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황현이 거주했던 구례를 비롯한 광주-전남의 군현에서 추진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당시 농민군 세력이 강한 광주-전남의 군현은 영광 광주 담양 장흥 무안 함평 동복 고흥 장성 등이었다. 대체로 전남의 서부와 내륙 지역이 해당되는데, 흔히 ‘동학의 大窟穴’로 불려졌다. 그러나 농민의 세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이 경복궁을 불법적으로 침범하여 친일정권을 수립하자, 전봉준은 일본을 침략자로 간주하여 제2차 봉기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전봉준의 지시에 호응하여 광주-전남 지역에서도 농민군을 각 군현별로 동원하였다. 즉, 장흥 순천 등 11개 군현에서 약 36,000명이 전봉준의 동원령에 호응하여 각 읍에 주둔하였다. 동원령에 응한 농민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백산대회에 참여한 특징을 보인다. 이는, 전봉준과의 연계가 깊은 인물들임을 의미할 것이다. 다만, 동원 규모가 2,000-5,000명으로 되어 있으나, 이 규모는 농민군 지도부에서 해당 지역에 할당한 규모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전남 서부지역에서는 전북 고창과 연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진도의 농민군 세력에 힘을 실어줄 정도로 강력했는데, 수세에 몰리던 음력 12월에서 다음해 1월 사이에 체포되어 희생되었다. 일부 체포를 면한 농민군들은 인근 지역으로 도망하여 이름을 바꾸고 목숨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전남 서부지역 농민군들은 서남해 도서지역으로 탈출한 경우가 많았으리라 믿어진다. 전남 중부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나주성 공략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나주성 공략에 앞장선 최경선 오중문 손화중 등은 최소한 여섯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끝내 나주성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 수백명 이상의 농민군들이 전사하였을 것이다. 그 후에도 수많은 농민군 지도자와 일반 병사층이 나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물론 기적처럼 풀려난 농민군들도 적지 않았으나, 고문이나 杖毒의 후유증으로 천수를 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주는 초토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농민군들이 나주로 압송되어 처벌당했다. 따라서 전라남도에서는 나주가 농민군의 대표적인 희생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화순은 나주성 공략에 앞장선 대접주 최경선과 그 부하 약 160명이 사망하였다. 화순의 모후산에 피신했다가 체포되거나 전사한 것이다. 전남 북부지역의 농민군 활동은 대체로 남원대도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담양의 농민군 활동은 크게 보아 용구동접과 남응삼의 활동으로 집약된다. 용구동접은 김형순과 김문화의 주도로 담양의 농민군 활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장태 접주는 대장태를 활용하여 장성 황룡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수훈을 세웠다. 그리고 담양접주 남응삼은 담양 전체를 관할하는 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