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page

12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집강소의 총본부인 전라좌우도 大都所를 전주 감영에 설치하고 그의 비서 宋喜玉을 전라좌우도 도집강에 임명하여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각 군현에도 치안유지와 폐정개혁을 담당할 집강소 혹은 都所를 설치하였는데,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나주읍에 집강소를 설치할 수 없었다. 나주목사 민종렬이 농민군의 입성을 막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집강소는 치안 질서의 확보가 우선적 임무였으며, 폐정개혁의 추진은 그 다음 순서였다. 그만큼 군현마다 수령이 부임하지 않은 곳이 많아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전봉준은 집강소의 네가지 임무를 각 군현에 내려 보냈다. 즉, 무기류의 파악과 징발한 마필의 반환, 군수물자 징발을 빙자한 약탈 금지, 민폐 금지와 처벌 등을 명시하였다. 전봉준의 지시대로 각 군현에서는 농민군 보유 무기와 장비의 파악, 농민군의 약탈과 토색 금지, 民訴 등을 해결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러한 활동은 지방관의 임무에 비교될 정도였으며, 여기에 동학의 포교활동도 추가되었다. 이는, 각 군현의 집강소가 농민자치기관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집강소 활동은 각 군현에서 활동하는 농민군 세력의 강약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예를 들면 농민군 세력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폐정개혁을 활발하게 추진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은 치안유지 활동조차 버거웠다. 광주-전남의 경우 나주는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아 폐정개혁을 추진하지 못했으나,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 상당한 개혁이 추진되었다. 예컨대, 구례의 경우 구례현감을 역임한 남궁표는 스스로 앞장서서 『동경대전』을 암송하며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현직 현감인 조규하도 입도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군의 활동을 적극 후원할 정도였다. 420) 집강소 설치 이후 농민을 물론이거니와 수령과 선비들도 동학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수령과 선비 중에서 적(농민군-저자주)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것 을 본받아 먼지만 일어나도 적에 귀속하여 붙었으며, 『동경대전』을 마치 위대한 성인이 저술한 것처 럼 여겼다. 마을에서는 강당을 설치하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부하였고, 어린아이들은 모두 “擊劍弓 乙之歌”를 입에 달고 있어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侍天主를 읊어대는 소리가 좁은 길에 가득하였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232쪽). 『동경대전』을 매우 신성시하고 동학의 포교가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강당까지 설치하여 동학을 공부할 정도였으며 ‘시천주’를 암송하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찰 정도였다니 당시 동학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동학 입도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는지, 진정성을 담보한 것이었는지는 애매한 편이다. 남궁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성군으로 활동한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학의 수용은 큰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믿어진다. 즉, 집강소 시기에 농민군들은 420) 황현, 김종익 옮김, 『번역 오하기문』, 228-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