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page

동학혁명 121 제4장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의 특징 광주-전남의 동학농민혁명은 크게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지역적 전개과정을 보면 대체로 전라 우도에서 좌도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여준 점에서 특징의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전라 우도는 현재의 전라남도 서부에 해당되는데,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인 고창과 인접한 영광으로 혁명의 물결이 먼저 파급되었다. 그 여파는 장성과 함평에 직접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부는 농민군을 이끌고 고창 영광 무안 함평 등 전라우도를 순회하며 군사력을 강화하여 전주성을 장악함으로써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제1차 동학농민혁명의 지역별 전개과정을 5개 권역, 서부-중부-북부-남부 연해- 동부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본 것이다. 먼저 동학농민혁명의 불을 지핀 계기는 동학의 수용에서 찾을 수 있었다. 광주-전남의 동학 수용은 189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동학의 수용은 대체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거쳤다. 즉, 현재의 전라북도에서 전라남도로 수용되었는데, 대체로 친족간에 전파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처럼 동학이 전라도 전체에 확산되자, 동학교단의 지도부는 자신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억제하고 동학의 합법화뿐만 아니라 교세를 강화하기 위해 교조신원운동을 전 개 하 였 다. 여 기 에 광 주-전 남 의 동 학 교 인 들 은 적 극 적 으 로 참 여 하 였 다. 가 장 대 표 적 인 교조신원운동인 보은취회에 광주-전남의 약 8개 군현의 동학교인들이 가담하였다. 특히, 고흥의 동학교인 수십명이 원평취회에 참여한 다음 보은취회에도 가담한 사실이 주목된다. 한편, 무장기포이후 백산대회에는 광주-전남 17개 군현의 농민군 지도자 약 60명이 참여하였다. 보은취회에 광주-전남의 8개 군현이 참여한 것과 비교하면 2배로 증가한 것이다. 당시 백산대회에는 광주-전남의 대부분의 군현이 참여한 것이다. 1개 군현당 1-2명에서 최대 15명의 농민군 지도자가 농민군을 이끌고 가담했는데, 제1차 동학농민혁명기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약을 펼쳤는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많지 않다. 다만, 장흥의 농민군 지도자 이방언의 농민군 부대가 장성 황룡싸움에서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봉준은 전라 우도를 우회하는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그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지역이 바로 우회전략의 무대였던 영광 함평 장성 등 전남 서부지역이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의 지혜가 돋보이는 이른바 장태전술이 창안되었고, 그것을 활용하여 장성 황룡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기가 충천한 농민군이 손쉽게 전주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값진 승리의 계기를 제공한 지역이 바로 광주-전남이었다. 전주성 함락에 충격을 받은 조선 정부는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와 관민상화책, 이른바 전주화약을 맺었다. 이로써 각 군현단위로 폐정개혁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광주-전남의 집강소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 기간이 짧기도 했지만, 농민군 측의 기록이 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