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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19 일반인에게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흥의 농민군이 기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복만은 남원대도소 김개남의 핵심인물로서 자주 고흥을 비웠던 것 같다. 그는 김개남이 음력 6월 25일 남원으로 들어오기 며칠전에 먼저 남원의 교룡산성을 점령한 바 있으며, 그 후 구례를 거쳐 고흥으로 돌아갈 때 염찰사 엄세영으로부터 1천량의 여비를 지급받기도 하였다. 그는 음력 11월 중순에는 재차 남원성을 탈환한 후 운봉을 공격해서 영남방면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416) 그러나 운봉을 지키는 박봉양의 수성군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그는 농민군을 수습하여 고흥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흥의 농민군들이 영호도회소와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고흥출신의 유복만이 김개남의 핵심인물로 활동한 점으로 헤아려 보면 김인배와도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고흥지역의 농민군들도 진압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현재 고흥의 경우에는 농민군의 최후항전에 관한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다. 417) 고흥은 1894∼ 1895년 사이에 농민군이 10여 차례에 걸쳐 들어오자, 1894년 음력 8월 고흥의 향리들을 중심으로 관병을 규합하여 성을 방어함으로써 농민군의 침입을 막아 왔었다. 여기서의 관병이란 아마도 고흥 관내의 군사요새지인 呂島 鹿島 鉢浦 蛇渡鎭 등에 주둔한 군대를 말할 것이다. 따라서 고흥읍성은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1895년 음력 정월초 농민군 지도자 유복만이 대거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인솔하고서 성 밖의 동북쪽 두 개의 산에 진을 쳤다. 이에 수성군이 산 아래에 내달아 포위하려 하자, 농민군은 곧 해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농민군이 해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은 고흥에 찾아들었는데, 가장 먼저 온 것은 일본군이었다. 음력 12월 28일(양 1.23) 少尉 藤板松太郞이 이끄는 병사 60명이 고흥에 들어와 3일간 주둔한 후에 돌아갔다. 그리고 1895년 음력 정월 12일(양 2.6)에는 좌수영군이 초관 1, 순검 1, 통역 1, 일본군 50명과 함께 고흥읍에 도착하였다가 바로 떠났다. 또한 순무영 선봉진 역시 음력 정월 초3일에 참모관 1, 별군관 2, 경군 20명, 잡색군 16명 등을 인솔하여 왔다가 되돌아갔다. 일본군과 관군이 들이닥쳤을 때에는 고흥의 수성군들이 농민군 지도자 유복만과 吳俊彦 등 27명을 붙잡아 처형한 이후였다. 당시 유복만은 수성군의 포군 鄭在洪에 의해 체포되면서 回龍銃 1정을 빼앗겼고, 고흥의 농민군 지도자 咸良振은 포군 金連三에 의해 체포될 때 모젤총 1정을 빼앗겼다. 또한 대접주 송년섭은 체포되어 나주로 이송 중, 탈출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다. 418) 그 후에도 농민군 수색작업은 계속 되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고흥지역의 상당수 농민군은 장흥 방면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흥의 李邦彦은 고흥에서 장흥에 이르는 동학포에서 7만 명의 농민군을 규합하였다. 그는 전북 금구 이하의 동학포에서 10만 명을 동원한 손화중과 합세하여 전라도 강진과 해남 사이에 416) 황현, 『번역 오하기문』, 227쪽. 417)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52∼653 677∼680 689쪽과 「선봉진정보첩」, 같은 책 하, 243 258쪽. 418) 『천도교회월보』 252(1931. 12), 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