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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여수의 좌수영에서도 농민군 색출 작업이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좌수사 김철규는 5량의 현상금을 걸어 농민군을 붙잡아들였다. 412) 그리하여 약 500명의 농민군이 체포되었는데, 이들을 모두 목베어 좌수영의 성문에 걸어두고 시체는 방치해서 그 참상을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김철규는 좌수영군을 광양 순천 낙안 보성 등지에 파견하여 수많은 농민군의 체포와 살상 및 방화를 일삼았다. 특히, 영호도회소의 본영이 있었던 순천에 와서는 좌수영을 공격한 것에 대한 응징차원에서 훨씬 참혹한 행위를 하였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농민군 가운데 일부는 좌수영에 끌어다 그곳에서 처형하기도 하였다. 순천 인근의 낙안에서도 농민군에 대한 진압은 계속되었다. 음력 12월 초순, 낙안군에서도 아전과 일부 주민을 중심으로 민포를 결성하여 농민군이나 그 관련자를 체포하기 위한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413) 그 결과 음력 12월 25일(1. 20)에 낙안군 동면 출신인 李守禧와 22일에는 보성접주 安奎馥이 각각 체포되었다. 414) 이수희는 처음에 고흥출신의 柳福萬 세력이었는데, 김인배를 따라 좌수영 공격시 中軍으로 참여한 바 있었다. 그는 25일 밤에 붙잡혀 다음날 아침 南上面 雙田의 길 위에서 軍民이 모인 가운데 처형되었다. 湖左都接主라 불리기도 한 안규복은 22일 오후에 외서면 突伊峙에서 붙잡혀 와 다음날 오후 2시경 군민을 모아놓고서 처형하였다. 이들의 머리는 일정기간 효수된 후에 좌수영에 보내졌다. 또한 낙안군수 張敎駿은 김개남 부대의 청주공격시 선봉진에 참여한 농민군 지도자 姜士元을 조종하였으며, 남상면 七洞에 사는 접사 崔煥九와 농민군 지도자 趙甫汝를 붙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낙안군을 수성하는 한편, 수 백명의 농민군을 체포, 귀화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 415) 다만, 음력 9월에 낙안읍성의 공격을 주도한 양하일은 일본군이나 관군 혹은 민포의 추적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흥(옛이름 興陽)의 농민군 활동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까지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아래의 기록이 그것이다. 흥양 지방 적은 자못 기강이 있었고, 접주 유복만은 일당을 잘 통제하여 그가 가는 곳에서는 부자와 교활한 구실아치로 소문이 난 사람들만 피해를 입었을 뿐 나머지 일반 백성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복만이 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모두 안도의 숨을 쉬었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178쪽) 고흥의 접주 유복만은 농민군을 잘 통제하고, 탐학한 관리와 謀利輩들만을 징치하였을 뿐이며 412) 김계유 편, 앞의 책, 267쪽. 413)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10쪽. 414) 이하는 「」순무선봉진등록」, 위의 책, 644∼645쪽과 「선봉진정보첩」, 위의 책 하, 245∼249쪽을 참고함. 415) 이상은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68∼669쪽을 참고하여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