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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17 도접주 전갑이 이하 약 30명은 1895년 1월 5일 하동의 민병들에 의해 총살, 효수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하동의 민병들은 광양의 백운산을 포위하여 불을 지르고 동굴을 수색하였으며, 약탈도 서슴치 않았다. 蟾津鎭과 蟾溪驛의 경우에는 특히 농민군이 많아 피해가 속출하였다. 이 지역은 ‘동학의 소굴’로 알려져서 동네 전체가 불에 타버린 경우도 많았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당시 농민군의 시체를 섬계역이 있는 동네 앞에 짚을 쌓아놓고서 불을 질러버렸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역이나 진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한편, 광양읍에서 수성군을 주도한 인물은 군수를 역임한 金碩夏였다. 409) 그는 아마도 향리들과 일부 주민의 추대를 받아 농민군 공격에 앞장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광양의 수성군들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오로지 김석하만이 「동학당정토인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진압과정에서의 가혹행위가 문제되었거나, 이들의 전공보다는 일본군과 하동의 민포들의 보복행위로 말미암아 농민군의 피해가 크지 않았나 한다. 당시 광양에서 벌어진 농민군의 처참한 희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① (음력 12월) 초8일 하동 병력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광양에 들어와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집 천여 채 를 불태웠다. 적은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고 평민들도 많이 죽었다. 이때의 살육과 약탈의 참혹함은 적보다 훨씬 더 심했는데 대개 영남우도 병사들에 의해 자행되었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296쪽) ② 광양에서는 산에 불을 지르고 동굴까지 샅샅이 수색하였는데 마치 짐승을 사냥하는 것 같았다. 광 양은 좌도에서 가장 철저하게 적의 토벌이 행해졌다( 위의 책, 309쪽). 앞서 보았던 농민군 명단을 고려한다면, 1천여 채의 가옥이 불타고 1천여 명의 농민군이 희생되었다는 기록은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얼마나 험악한 상황이었던지 동학에 매우 비판적이던 황현조차도 반농민군의 잔인함을 비난하였다. 농민군의 체포와 살상에 앞장선 사람들은 대체로 하동의 민포들이었다. 그들은 보복 차원에서 대량 살륙과 방화를 자행하였는데, 마치 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잔혹한 살상이 문제가 되자, 장위영 군대를 인솔하여 농민군 진압에 나섰던 李斗璜조차 하동의 민포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살상과 약탈을 금지시켰다. 이로 인하여 광양 사람들은 이두황을 매우 고맙게 생각할 정도였다. 410) 음력 12월 7일(양 1.2), 백운산으로 피하여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접사 조두환은 훗날 “天師의 感應하신 은덕”으로 누차 화를 피하였다고 적고 있다. 411) 이러한 점만으로도 가히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409) 「東學黨征討人錄」, 『동학란기록』 하, 621쪽. 410) 황현, 『번역 오하기문』, 303쪽. 411) 『천도교회월보』 279(1935.9), 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