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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15 「東學黨征討人錄」과 「甲午軍功錄」에 올라있는 이른바 順天義旅로는 尹成涉 千士成 李宗甲 金聖祿 李榮柱 成庸熙 金彦燦 吳明官 金孝燦 등과 순천 營將 李豊熙와 軍校 金景雲 등도 포함되어 있다. 400) 이들은 義旅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체로 아전이나 군교 또는 出身의 신분으로 보여진다. 그 중 이종갑과 김언찬은 장교, 천사성과 윤성섭은 출신, 김효찬 이영주 성용희 등은 下吏였다. 401) 그리고 좌수영을 지킨 공로로는 좌수사 김철규와 초관 곽경환 등이 「갑오군공록」에 올라 있다. 위의 인물 가운데 순천부의 영장 이풍희는 농민군 진압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다. 사실, 그는 집강소 시기에 순천에 부임했었다. 당시는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이 순천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그 역시 순천부사 이수홍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곤욕을 당하였던 것 같다. 그후 그는 좌수영으로 도망하였다가 좌수영의 선봉이 되어 순천으로 돌아와 보복 차원에서 그의 분함을 설욕하려 하였던 것이다. 402) 그러한 그를 좌수사 김철규가 겨우 달래어 진정시켰다고 하나, 이 과정에서 애매한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였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순천부의 좌수와 공형 등이 그에게 잡혀 좌수영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농민군에게 군기를 제공하고, 官長을 내쫓았으며, 주민들의 전곡을 소모하였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민군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행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수성군과 관군 및 일본군들이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을 진압하면서 순천 府民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군용전과 군수물자도 막대하였다. 403) 예컨대, 순천에서는 1894년 음력 4월에 모집한 포군의 군용전으로 약 2,085량이나 들었다. 그리고 음력 12월 이후 진압군들에게 바친 금액이 총 4,943량이나 되었으며, 白木 200필이나 되었다. 낙안에서도 진압군의 경비로 3,449량이 지출되었으며, 광양에서는 약 9,066량과 백미 50여 석이 들어갔다. 또한 고흥에서는 약 4,118량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경비는 대부분 좌수영군이나 우선봉군 및 일본군의 식사비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순천의 영호도회소가 공격당할 때 대접주 김인배는 다행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는 잔여의 농민군을 이끌고 광양으로 갔으나, 그곳 역시 순천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래의 기록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각처의 동학도 1천여 명이 본읍(광양-저자주)의 성내에 둔취하여 소란함이 무상하던 중에 이달 초이 렛날 吏民이 일시에 힘을 합하여 이른바 영호대접주 금구 김인배와 영호수접주 순천 유하덕 두 사람 을 아울러 체포, 효수하여 주민들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나머지 도당 90여 명을 포살한 연유는 이미 우선봉 사또의 행차시에 소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후에도 民軍을 거느리고 100여 명을 잡아 즉시 포살하였습니다.(「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56쪽) 400) 「東學黨征討人錄」, 『동학란기록』 하, 618∼624쪽과 「갑오군공록」, 같은 책, 717∼725쪽 참조. 401) 「동학당정토인록」, 위의 책, 618∼624·681쪽. 402) 황현, 『번역 오하기문』, 296쪽. 403) 『각사등록』 54, 699∼700쪽.